2023.02.1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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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6)

 

인간관계에서 필수 불가결한 기술을 하나 꼽으라면 아무래도 언어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말과 글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의사 소통체계다. 말을 잘하면 좋은 호감을 줄 수 있지만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분노, 상처, 실망을 안겨주면서 관계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이 잘못된 말 한마디로 뭇매를 맞는 일이 허다한 것을 봐도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기술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회에서도 언어에 대한 가르침이 빠지지 않는다. 3:2절을 인용하여 신자는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하고, 4:25을 인용하여 거짓말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고 한다. 4:29절도 바람직한 언어생활을 가르치기에 적당하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불평하고, 비방하고, 조롱하고, 빈정대는 언어들을 더러운 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그리고 다른 지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말을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선한 말로 해석하면 신자에게 언어는 신앙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렇다면 믿음에도 언어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실제로 언어가 우리를 더럽게도 하고 선하게도 한다는 것인가?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라고 말한다. 혀를 말, 즉 언어로 해석하면 언어가 심판을 의미하는 불이고 불의의 세계라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언어로 인해 온 몸이 더럽혀지고 지옥 불로 삶의 수레바퀴가 불살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말을 못 하는 언어 장애인이 되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는 말씀처럼 혀가 나를 실족하게 한다면 차라리 잘려 말을 못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을 말에 관한 내용으로 해석한다 해도 우리가 말하는 것을 극히 조심하며 생활하는 것도 아니다. 항상 조심 없이 튀어나오는 말 때문에 오해를 사고 다툼이 생기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허다하다. 결국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게 하는 혀에 대한 엄중한 내용을 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세상 교훈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가르친다. 한마디로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한다(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을 의미하고 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혀다. 하지만 혀가 말의 출처는 아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18)라고 말씀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이 혀를 통한 언어로 현실화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말은 단지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더러운 마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말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언어의 기술적인 문제로 해석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하기를 믿음의 행함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으로 공존하지 않는다. 선한 마음이 있어서 선이 나오고 악한 마음이 있어서 악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더러운 마음 하나로 존재하고 더러운 것만 나온다. 이것을 야고보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3:11)라고 말한다.

 

 

그러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을 저주하는 기독교인은 없다. 누구나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높이고 섬기는 척한다. 그런데 같은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기도 한다. 찬송의 출처가 온전한 마음이라면 거기에서 저주가 나오면 안 된다. 결국 저주가 나온다는 것은 마음이 더럽다는 뜻이고 찬송 또한 거짓이라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더러운 마음에 의해 움직인다. 누구도 마음을 자기의 뜻대로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뱉는 말 하나하나도 항상 실수로 드러나 마음이 더럽고 악하다는 것을 낱낱이 보여준다.

 

 

따라서 말에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 해도 마음은 여전히 더러운 상태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숙이나 성화라는 개념이 없다. 육의 행함을 개선하고 고치는 것이 악한 마음에 영향을 끼쳐 선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몸에 관심을 두고 가꾸면서 자랑하는데 혀는 예외다. 입 안에 있는 혀를 타인에게 내밀어 보여주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혀를 두고 잘생겼다 못생겼다고 하지도 않는다. 외출할 때 거울을 보고 온 몸을 살펴도 혀는 보지 않는다. 간혹 혀를 보고 건강을 살피는 정도다.

 

 

그런데 작은 지체인 혀가 자랑하는 큰 것은 무엇일까?(3:5) 야고보는 그것을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으로 빗대어 말한다. 혀가 작은 불이 되어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것이 큰 것이다. 더구나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는 것은 멸망의 심판을 의미하기에 큰 것이 아닐 수 없다.

 

 

광풍에 밀려가는 배를 사공은 작은 키 하나로 자기 뜻대로 운행한다. 작은 키가 배를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공의 뜻을 배에 전달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혀는 우리가 더러운 마음을 가진 불의한 자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히려 훼방하는 어리석은 자로 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키가 된다. 그래서 혀를 불의의 세계로 표현한다.

 

 

수레바퀴는 굴러가다가 목적지에 도달해서 멈춘다. 삶의 수레바퀴는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삶 전체가 불살라져야 할 불의의 세계임을 혀를 통해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혀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을 불사르는 저주가 될 뿐이다.

 

 

 

혀에서 사람을 살리는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복음뿐이다. 더러운 마음이 성령으로 제어되며 더러움을 그대로 드러내어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게 하는 복음이 사람을 살린다. 이것이 성령의 뜻대로 키가 되어 움직이는 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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