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8 11:13

사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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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14)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생명 나무만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지 않았다면?’이라는 의문과 아쉬움이 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그냥 현실에 대한 체념이다.

 

 

교인들은 그러한 의문도 얼마든지 가져볼 수 있는 것 아니냐?’라며 가볍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생각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반드시 드러내는 전형적인 죄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선악 개념이 선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을 위한 일이다. 그래서 죄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선악 나무를 두지 않은 선함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불의하다 하며 다투는 것이고 결국 인간은 지옥 가야 할 죄의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을 나타낼 도구로 만드셨다. 처음부터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 선악 나무를 두신 것은 생명 나무가 의미하는 바를 증거 하기 위함이다. 그 증거를 위해서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에게 관심과 가치를 두는 죄를 드러낼 도구로 선악 나무를 두신 것이고, 죄를 통하여 인간은 구원에 관해서 완전히 불가능한 죽은 자가 되게 하신 것으로 시작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죽은 인간이 어떻게 생명에 있게 되는지 그 과정과 내막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고 영광과 찬송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철저히 배제된 구원을 통하여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선지자의 예언에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처녀가 남자 없이 홀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도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은 남자와 여자, 즉 인간의 육체와 무관한 존재다. 이렇게 선지자로 예언된 아들이 마태복음 1장에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예수로 오셔서 인간에게 함께 하신 것이다.

 

 

따라서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였다는 것을 단순히 기적의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처녀 잉태의 징조에는 인간의 육체를 따라서 오지 않은 아들의 구원은 인간의 육체와 협력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구원에 반발한다. 구원의 능력은 예수께 있고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도 구원받기 위한 육체적 조건을 제시한다. 구원받은 증거는 육체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배제된 구원이 아니라 협력하는 구원에 마음을 두며 그것을 자기 가치와 공로로 높이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한 것은 아하스가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유다를 지키고자 한 일을 배경으로 한다. 아하스는 앗수르의 힘으로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힘에 기대고자 하는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징조를 구하지 않은 아하스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징조가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문제는 이 징조를 징조로 알아볼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과 과학적 지식의 모든 것을 동원한다 해도 여자는 남자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만약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라는 소문이 들린다면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와 동침했다는 확신 속에서 비난받는다. 유대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을 했지만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가만히 끊고자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선지자로 예언된 징조가 나타난다 해도 징조를 알아볼 능력이 없다.

 

 

징조를 알아볼 안목조차 없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구원에 협력하겠다는 것부터 교만이다. 협력은 고사하고 징조로 오신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인정하지 않고 붙들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들이 믿음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길로 간다고 자부한다. 이것이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은 이유다.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에 징조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아하스가 어리석게 느껴질 것이다.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은 분명 불신앙인데 그러한 자신의 현실을 안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하스와 다른가? 아하스가 앗수르의 힘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힘이 되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살면서도 교회와의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바르다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아하스는 어리석고 나는 어리석지 않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무능한 안목이다.

 

 

의문이 되는 것은 이사야의 징조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우실 것을 깨닫게 하고 힘을 내게 하는 현실적인 징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늘의 군대를 보여주는 식의 징조가 아하스에게는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징조는 아하스가 현실의 문제를 헤쳐 가는 데 힘을 내게 하는 효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징조의 참된 의미는 아하스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며 믿음 또한 믿음이 아님을 누구도 알 수 없는 처녀가 잉태한다는 징조로 나타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이란 말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한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돌보시고 지켜주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로 이해한다. 하지만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징조의 성취는 오직 예수님이 홀로 이루실 구원을 증거 한다. 따라서 임마누엘이라는 징조의 의미를 알게 된 새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으로 임마누엘을 증거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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