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5 11:04

히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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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2:11)

 

교회에서 교인은 서로를 형제, 자매로 호칭한다. 하지만 형제, 자매의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용어의 바른 의미보다 친근하고 좋은 교인 관계를 이루는 것에 더 관심을 둘 것이다. 의미야 어떻든 좋은 관계를 이루면 된다고 생각한다. 목사 역시 형제의 성경적 의미보다 교인의 관계를 중요시하기에 형제, 자매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행함을 가르치는 것에 주력할 뿐이다.

 

 

사람들은 아마 같은 교회에 소속되면 당연히 형제, 자매의 관계가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교회를 옮기면 예전 교회에서의 형제, 자매 관계는 끊어지고 새로운 형제, 자매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관계일 뿐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 자매의 관계는 아니다.

 

 

형제 관계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을 한 근원에서 난 형제로 말한다. 즉 형제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이가 함께 한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인으로 등록하여 교회에 소속됨으로 만들어지는 형제는 없다. 그것은 거룩하지 않은 자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이 빠진 인간관계일 뿐이다.

 

 

인간관계에 하나 됨은 없다. 모두가 나, 너라는 개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과 뜻이 다르다. 이것이 갈등을 유발하고 고린도 교회처럼 생각과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분파로 나뉘기도 한다. 오늘은 서로 웃고 형제라 부르며 함께 하다가도 사소한 일 하나로도 미움의 관계로 돌변한다. 인간의 이러한 성질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나 된 형제 관계는 없다.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은 본래는 부끄러운 존재였다는 뜻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로 인해 거룩함을 입은 것이 성도라 해도 존재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였음을 모를까? 모른다면 부끄러운 자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은혜에 무지한 자일 수밖에 없다. 성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성도라면 형제 관계는 부끄러운 자로 하나 되고 함께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교인들이 과연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러운 자로 서로를 형제로 호칭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그 어떤 경쟁도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경쟁은 서로 우월한 자리로 가기 위해 싸우는 것인데 모두가 부끄러운 자라면 우월한 자리에 있을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는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성령으로 만들어지는 관계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것만이 형제의 조건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거나 타인이 아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가리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벗는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삼은 행위가 아담 안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결국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해도 서로 자신이 만든 것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며 함께 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것으로 부끄러움을 가린 인간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 인간의 부끄러움은 하나님이 가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거룩하지 않은 자들에게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 보내심으로 거룩하게 함을 입게 하신 하나님의 행함이다. 따라서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예수님이 대신 지고 부끄러운 자의 길을 가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알지 못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은 먹지 말라는 말씀에 어긋난 자가 된 것인데 인간은 단지 자기 벗은 몸의 부끄러움에만 관심을 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님을 보내셔서 말씀에 어긋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고 거룩함을 입게 하셔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구원의 내막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믿음의 열심을 들먹이며 부끄럽게 한다. 십일조, 성수 주일, 기도 등등의 행함을 열거하며 하나님이 부끄럽지 않다고 하신 성도를 부끄럽게 만든다. 심지어 교인 수는 다른 교회보다 많은데 헌금 수입은 오히려 적다면서 그것이 부끄럽다고 하는 목사도 있다. 무엇이 부끄러움인가를 알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의 행태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부끄러운 신자로 보이지 않으려고 헌금을 하고 교회 일에 열심히 참석한다. 이처럼 부끄럽지 않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어 자신을 가린 것처럼 개인의 가치와 자존심에 매여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데 우리는 항상 사람을 의식하면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3,34)라고 말한다.

 

 

교회가 말씀을 이용해서 교인을 고발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십일조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이용하여 십일조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고발한다. 이런 것이 사탄이 말씀을 이용해서 성도를 고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고발당하면서 자신을 정죄하게 되면서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스스로 가리고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거룩함을 입은 성도는 예수님의 형제로 부름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다. 예수님의 의로 옷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믿음으로 바르게 살고 있는가?’라는 자신을 향한 헤아림은 의미가 없다. 형제는 함께 주를 바라보기에 부끄러운 인간이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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