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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3:1-10http://onlycross.net/videos/100228am-lee.wmv

설교 이태현 목사

 

 

<본문>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슥 3:1-10 개정)

 

 

<설교>

아담의 범죄로 타락된 인간은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고, 축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판단력 즉 지혜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 중에 살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저주 아래 있으면서도 저주인줄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의 기준과 판단력을 가지고 축복이 아닌 것을 축복인 것으로 오인해서 그 일에다 목숨을 걸고 청춘을 허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죽음의 권세가 미칠 수없는 생명을 누림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일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인간이 천하를 다 가졌다 해도 죽음이 오면 인간으로서 모든 기능과 인격과 가치가 다 무너지고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저주이고 비참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이라는 권세아래 저주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저주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죄 중에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 합당하고 상응하는 죽음이라는 저주와 비참의 범주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세상에서 남들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인간은 죽음이라는 저주의 범주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인간에게는 진정한 생명이 없는 죽음이고 저주입니다.

 

 

지금 인간이 가진 생명은 죽음에 의해서 병든 생명입니다. 죽음의 권세에 종노릇하는 생명입니다. 전혀 의가 없고, 거룩이 없고, 말씀이 없고, 지혜가 없는 변질된 생명입니다. 이러한 생명은 진정한 생명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남보다 좋은 환경 속에서 많은 것을 소유해서 산다 해도 이미 이 세상이 죄요 죽음이기 때문에 생명이 아닌 저주아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사람들이 원하는 생명이 없고, 축복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 사는 성도라면 무엇이 생명이고 축복인 것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고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일한 그 생명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 생명 때문에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희생하며 자기라는 인생을 바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라고 하면서 아직도 무엇이 죄요 죽음이며, 무엇이 축복이고 생명인줄 모른다면 그는 성령이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말씀이 없는 자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깨달아 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있는 자는 말씀이 있는 자이고, 말씀이 있는 자는 성령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써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마비되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소경이요 무지한 인간이기 때문에 성령이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알 수가 없고, 말씀을 알지 못하고는 죄를 모르고, 의라는 생명을 모르고,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과 관계 속에 사는 축복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진정한 생명이 무엇이며 축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이 무엇이며 축복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인간이 쳐하여 있는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1-3절의말씀을 보면 인간은 죄로써 옷 입고 죄와 더불어 불과분리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죄로 더러워진 죄인으로서 마귀의 종 된 자입니다.

 

 

죄의 출처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이 죄를 가지고 인간을 꾀이고 유혹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를 지어 죄의 종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고 마귀와는 한 통속이 된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인간이라는 자기를 우상화하고 자기를 중심해서 살게 한 것입니다. 영혼이 중심이 아니라 육체가 주체가 되고 중심이 되어 살게 한 것입니다.

 

 

마귀가 심어준 욕망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가 잘되어야 하고, 자기가 성공하고 출세해서 자기가 대접 받고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상식이고, 이 세상의 진리이며, 인간들이 만들고 쌓아올린 문화요 문명이며 이 세상의 풍습입니다.

 

 

마귀는 인간 속에 욕망을 부풀게 해서 오직 자기만의 영광이라는 찬란한 환상을 쫓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공부를 해도 이 환상을 쫓아가기 위해서이고, 결혼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무엇을 해도 오직 자기의 욕망을 채워줄 찬란한 환상을 쫓아 이일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신을 지키고, 신을 찾고 교회를 찾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열광하는 것도 자기의 욕망을 채워줄 찬란한 영광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목사의 성공이라는 찬란한 환상을 쫓아 교회하나 키워보고자 하는 마귀의 노림수에 놀아나는 일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에는 십자가의 도라는 말씀은 없고, 인간의 상식이 통하는 나의 성공이라는 허상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죄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지만 인간은 이것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 자기가 잘되고 자기 교회가 잘되는 일이라면 이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이 일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이미 이 세상은 마귀와 하나입니다. 마귀가 가진 정신과 사고가 이미 인간의 정신이고 사고방식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마귀의 정신이고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요 저주이며 이것이 비참한 죽음입니다. 마귀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마귀의 일이고 그것이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처럼 죄로서의 인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게 해서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죄의 역사요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나라도 없고, 영원한 사람,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은 하루하루의 삶이 죄를 먹고 마시며 죄를 생산하는 죄의 삶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형벌을 불러오게 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쏟아 붓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수고와 고통이고 망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의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의 욕망이 추구하는 자기의 영광이라는 환상을 쫓아 신의 이름을 부르고, 땀 흘려 수고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러한 정신 때문에 바벨론에 의해서 심판 받아 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70년이라는 환란을 겪고 돌아왔지만 이러한 마귀의 사고인 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시비하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죄 아닌 삶을 살수가 있으며 과연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의가 없고 생명이 없기에 축복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마귀를 이기고, 죄의 용서를 구하고, 죄에서 벗어 날 자가 없습니다.

 

 

마귀에 의해서 죄의 삶을 사는 이 세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축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죄냐 죄 아니냐를 정하는 기준이 하나님께 있기에 죄 용서하는 권한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마귀에 의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온 죄를 용서받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기준에 합당 할 때에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죄에 상응하는 죄 값이 치루어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원칙은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변함이 없습니다. 죄 있는 곳에는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형벌로 심판이 집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형벌 없이 이러한 심판 없이 죄 용서는 없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죄 된 우리들에게 맹렬이 진노를 쏟아 부으셨는데 그런데 그 맹렬한 진노의 자리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그 진노를 대신해서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이고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죄의 심판을 십자가위에서 집행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고 그 맹렬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수님으로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으로 버림받게 하시고, 예수님으로 피 흘리게 하시고, 예수님으로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죄인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끝내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죄인이 피할 수 없었던 저주를 끝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의 피 때문에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는 죄가 없는 것이고, 죄가 없음을 의로움이고 거룩이라 합니다.

 

 

4-5절의 말씀이 죄의 용서라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말은 죄 용서를 필요로 하는 자를 말합니다. 죄인 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의 권력도 아니고, 물질이라는 떡도 아니고, 마귀가 제시하는 찬란한 영광도 아닙니다.

 

 

죄인 된 인간에게는 오직 죄를 용서받는 것뿐입니다. 이 죄 용서를 통해서만 모든 매듭이 풀리게 됩니다. 용서가 없는 생명, 용서가 없는 축복, 용서가 없는 기쁨은 없습니다. 이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만 용서가 됩니다. 이 피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서 거룩한 피를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이고, 어떤 죄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선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용서는 하나님의 행위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있는 자는 용서가 있는 자이고, 예수님이 없는 자는 용서가 없는 자입니다. 이 용서가 거룩함이고 의로움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용서가 있는 자라야 하나님이 있는 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8절의 말씀은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 즉 용서라는 축복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구약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예표로 들어 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들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용서라는 축복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사용된 도구로서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그 나라 백성이 잘 먹고 잘 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는 자들입니다.

 

 

9절에서 일곱 눈이 가득한 돌은 하나님의 완벽한 약속입니다. 약속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라는 축복을 주실 것인데 그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방해하고 이스라엘이 변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써 용서받았다는 말은 피가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피가 있다는 말은 용서 받은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축복이란 하나님께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자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피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곧 우리의 생명이고, 거룩이며. 우리의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피만 있으면 됩니다. 미신을 쫓아 신의 도움으로 자신이 능력을 받아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종교인들처럼 특별한 능력을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생명이고, 거룩이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피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2:5절에는 하나님이 불 성각이 되어 지킬 것이고, 2:8절에는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할 때는 마귀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피로써 용서받은 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예수로 옷 입은 은총 속에 사는 자입니다. 이들이 가는 길에는 바로의 권세가 항복하게 되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도 양식이 공급되고, 여리고 성도 무너지게 됩니다.

 

 

즉 피가 있는 이들이 가는 길을 그 누구도 막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관계를 끊을 수없는 것은 ‘피’ 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붙들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승리가 보장되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유업으로 상속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롬8:31-39절에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용서라고 말하고 이것을 생명이요 축복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축복이고 저주입니까? 무엇이 생명이고 죽음입니까? 무엇이 죄이고 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용서받는 것입니다. 용서받았다면 피가 있는 자입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거룩이고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필요로 해서 살기를 바랍니다. 용서의 중요성 그 가치와 소중함을 날마다 삶 속에서 보여주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믿어지고 그 피에 가치를 부여해서 그 피를 소중하게 여기며 이 ‘피’ 만으로 만족해서 살고 있다면 그는 용서를 받은 자이고, 그리스도를 받은 자이고, 예수로 옷 입은 자이고, 진정한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마18:24-35절을 보면 이 용서의 중요성을 모르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주인에게 탕감 받아 놓고, (일만 달란트는 지금으로 10억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자기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죄의 비참함과 죄의 무서움을 모르고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받은 용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모르는 자입니다.

 

 

우리의 흥하고 망하는 것, 죽고 사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에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흘리신 피의 용서에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신의 용서라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용서를 설명하고 증거 하게 됩니다. 성도는 이 진리를 아는 자요 그래서 용서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인간은 이웃의 원한을 갖고 용서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없고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중에 사는 인간의 저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써 다시 태어난 자는 용서의 가치를 알고, 용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는 용서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용서에는 사랑만 있고 행복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용서받았습니까? 바로 이러한 자가 가장 귀한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십자가에 강도는 용서라는 축복을 받고 예수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축복을 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다가 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귀가 꾀이는 환상에 불과한 이 세상의 것들을 축복이라고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모든 보화가 있음을 알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피로써 만족하시고 감사하고 증거 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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