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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4:13-14http://onlycross.net/videos/20100404.wmv

<본문>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3-14)

 

 

<설교>

 

◎ 예수님의 부활

 

신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신자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부활 신앙이라고들 합니다. 부활이란 잘 아시는 대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다시 또 죽어야 하는 살아남이 아니라 영원히 죽음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살아남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다시 또 죽어야 하는 살아남이라면 부활 후에도 여전히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약에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있고(왕상 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이 있습니다(왕하 4:17-37). 그리고 신약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있고(막 5:21-24),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있으며(눅 7:11-17),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았고(요 11:1-44), 다비다라 하는 도르가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행 9:36-43). 이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시 죽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의 살아남은 부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소생, 또는 회생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을 말할 때 전제해야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상태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기존의 자기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들은 그 하나하나가 기존 세계와 부딪히는 것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심으로 굳게 세우고 있었던 그들의 종교 세계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하나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유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한 인간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이 지키고자 하는 자기 세계의 헛됨과 무능함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계, 그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활로써 증거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신자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교리적 차원의 이론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고 알게 하는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존의 세상은 참되지 않고 헛된 것일 뿐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만이 참되고 영원함을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죽음의 세계 안에서 온갖 즐거움을 누리며 살다가, 죽은 후에는 또 다시 생명의 세계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곧 죽음의 세계임을 알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소망하는 자로 사는 것이 진심으로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예수 안에서 자는 자

 

그런데 ‘부활을 믿는다’는 말에서 한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자기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자신도 예수님처럼 부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집착을 하고 있는 죄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활신앙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14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관심을 두고 하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관심인가 아니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다시 부활하는 내가 관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이 되면 교회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로 부처와 같은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은 무덤이 있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음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도 부활하자는 식의 말만 난무할 뿐입니다.

 

 

또한 부활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예가 부활절 연합예배라는 행사를 하면서 서로 화합하고, 평화하고, 사랑하는 것이 부활 신앙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인간에게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계 평화와 화해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세계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는 죽음이 없고 따라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도 죽은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자는 상태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눅 8장에 보면 회당장의 딸이 죽어서 예수님이 가셨을 때, 슬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많은 사람의 비웃음을 샀지만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음은 인간에게는 슬픔이고 불행이고 공포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는 것은 편안함이고 안식을 뜻합니다. 죽은 자와 자는 자를 바라보는 인간의 느낌도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자는 사람은 평안하게 보이지만 죽은 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은 후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 두려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혹여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집착이 여러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두려움과, 공포, 또는 슬픔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필히 죽음으로써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 죽음을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함께 죽은 것으로 인정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 안에 있는 신자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단절이고 심판인데 예수 안의 신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신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생명의 세계

 

예수님을 신자를 부활시켜 주는 분으로 여기시면 안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부활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입니다. 즉 자기 부활을 위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주는 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자기에게 집착하여 살아가는 죄의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를 부활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신자에게 함께 해주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안에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미 죽음이 없는 생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신자는 그 몸이 죽는다고 해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관념으로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에 집착을 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몸이 죽은 다음에 주어질 혜택으로만 여길 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세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집착하여 세상의 문제로 인해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예수 밖에서 사는 것이고, 어둠의 세계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름만 신자일 뿐 신자의 신자 됨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세계도 위로가 안되고 힘이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 것에서 위로를 얻고 힘이 되는 것을 구할 뿐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부활은 모순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한 예가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한 여자가 여러 형제와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형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 형이 죽고 다시 동생과 결혼을 하여 결국 형제 일곱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면, 나중에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고 성경도 모른다고 하시고,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세계보다는 이 땅에서 말씀을 잘 지켜서 복 받고 사는 것이 최고였습니다. 확인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또 아직 아무에게도 체험되지 않은 불확실한 부활의 세계보다는 확실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그 세계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신자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그 능력에 둘러싸여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기에 믿지 못하겠고, 몸으로 체험되지 않기에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부활의 세계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볼 때는 죽은 자를 잔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를 육신으로 확인하고 감각하겠다는 것부터가 부활의 세계의 능력과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세상으로 산다고 해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고통과 슬픔과 힘든 일을 겪게 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신자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하고, 부활과 천국을 향한 소망이라는 것에도 희미해지게 됩니다. 지금 당장 힘이 드는데, 부활이 뭐고 천국이 뭐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핍박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재림하시지 않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지도 않습니다. 믿음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는데도 예수님은 가만히 계십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사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면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 먼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신자의 고난도, 죽음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음에 대한 위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예수 안에서 자는 자라는 말은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말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신자에게 위로가 됩니다.

 

 

신자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고 공포가 아니며 오히려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에게 육신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우리를 집착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고, 염려와 근심 걱정 모두가 육신이 원인이 되어 발생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곧 육신을 벗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신자에게 죽음은 오히려 홀가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잠깐 한다고 해도 길게 지속되지 못합니다. 또 다시 현실로 인해서 두려움과 염려의 세계로 빠져들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주께 붙들려 있고,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거할 수 없는 그 힘이 어리석은 우리를 붙들어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고, 깨닫게 하면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이 말이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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