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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10http://onlycross.net/videos/ep-02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 감사와 기쁨이 없는 신앙 ◎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면, 신자는 성경을 봄으로써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증거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은 곧 은혜와 평강이며 은혜와 평강은 더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충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뭔가 더 받고자 하는 것은 관심을 자기에게 두고 있다는 증거로써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오직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육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더 받고 싶어 하고 더 받을수록 감사와 기쁨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보다는 더 많이 받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러한 감사는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충만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아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면 충만의 은혜 또한 알지 못하고 감사와 기쁨보다는 부족한 것으로 인한 실망과 한탄만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부자 된 나’ ‘성공한 나’ ‘세상이 부러워하는 나’를 상상합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나’를 따로 구축해 놓고 항상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불만을 갖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만들고자 하시는 ‘나’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가 원하는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해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자가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면 현재의 형편과 사정을 초월하여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나를 어떤 자가 되게 하였는가를 알게 됨으로써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따로 간직하고 있다면 감사와 기쁨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새로운 시각 ◎

 

본문에서 사도는 예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런 설명들이 우리에게는 실질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반응일 것입니다. 죽은 우리를 살리고 하늘에 앉혔다는 말은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엄청난 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격과 감사는커녕 오히려 시큰둥한 반응이 앞서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고 하늘에 앉혔다고 설명을 해도 나는 실제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현실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가 살았고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사는 형편이 달라졌습니까? 아니면 성품이 천사처럼 달라지기라도 했습니까?

 

 

우리의 육신이나 성품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욕심도 미움도 시기도 그대로입니다. 그 정도가 조금 덜해졌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지면 자존심이 상하고, 여전히 교만하며 이기적이고 쉽게 낙심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보면 고상하고 인격적인 사람들이 많고, 그 생활 또한 모범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 비해 나은 것이 없고 오히려 못할 때도 많습니다. 또한 우리는 병들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다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니, 도무지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말하는 그 같은 내용은 예전의 사고방식과 시각에는 도무지 접목이 되지 않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전혀 다른 차이와 구별을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곧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변하기 위해 힘쓰기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은 신앙을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입니다. 신앙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게 되면 결국 나타나는 정도에 따라 신앙 또한 굴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자신을 포함하여 에베소 교회 신자 모두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모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세력에게 순종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본질상으로는 진노의 자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이 해를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둘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기 전에 우리가 살았던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주어짐으로 인해서 깨닫게 된 것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룬다고 해도 결국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원한 것을 이룬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과 함께 육신은 갈수록 파괴되어 갈 것이고, 그 어떤 인간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된 현실임을 안다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인생이 되었다고 해도 죽음 앞에서는 결국 무기력할 수밖에 없음을 알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현실로부터 떠나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어서 현실이 달라졌다고 해도 의미 있는 것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현실로부터 그 마음이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각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현실의 변화를 믿음의 증거로 여기지 않습니다. 현실이 어떻게 변화한다고 해도 결국 죽음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며 결국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은혜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자신과 현실의 변화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는 옛 성품일 뿐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은 완전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셨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이 신자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보여줄 만한 것을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되어 있는 것이고 신자는 그 말씀의 세계를 믿는 것이 곧 구원의 증거일 뿐입니다.

 

◎ 무엇으로 감사할까 ◎

 

분명한 것은 신자가 말씀의 세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있습니다. 그것이 감사와 기쁨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고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이 곧 우리에게는 충만이며,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에게는 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4,5절을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으로 완벽하게 증거되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긍휼과 사랑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 긍휼과 사랑을 누리고 있으며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자, 이제 무엇으로 감사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니고 감사할 조건을 골라야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알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엡 1:5-6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부르신 본래 목적이고 궁극적인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부르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능력은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무엇으로 안되는 일을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그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에게는 예수님만이 희망인 것이고,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신앙을 그런 용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현실을 보면서 실망하거나, 아니면 교만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루고 이루지 못한 것으로 스스로를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합니다. 믿음이 있기에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깨닫게 하고 하늘에 앉힌바 된 생명의 세계를 믿게 됩니다. 이같은 일은 세상 무엇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이 믿음이 주어진 것으로도 부족합니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한다면 믿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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