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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1-4http://onlycross.net/videos/2011.4.2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설교>

 

사람은 알려고 하기 보다는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은 복잡하고 어렵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믿는 것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는 성경을 깊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고 목사가 가르치는 것을 믿으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목사가 할 일이고 평신도는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신앙생활하고 믿으면 복 받고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아적이고 맹목적인 종교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얼마 전에 병으로 죽은 남편의 시신을 6년간 보관해 온 사람의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옥황상제를 모시는 사이비 집단에 심취한 친정엄마와 이모가 ‘죽은 남편의 장례를 치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부활한다’고 한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 경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죽은 남편의 시신을 6년간 보관한 여인의 관심은 친정엄마와 이모가 믿는다는 옥황상제가 아니라 엄마와 이모 말대로 하면 남편이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현대 교인들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복 주시는 분이고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전능하신 신’이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만 잘해주시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원하는 풍요로움과 평안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고 복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나 엄마의 말만 믿고 죽은 남편의 시신을 방안에 방치해온 여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신앙에서는 ‘신앙이 내 삶에 어떻게 연결이 되며,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에 대한 관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착하게 살고 복 받고 천국가면 교회를 다니고 목사의 말을 믿은 모든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부활에 대해서도 같은 성향을 드러냅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오시면 죽은 자가 모두 부활한다는 것을 믿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신을 방치 않은 것만 다를 뿐 부활이라는 말만 믿고 언젠가는 부활한다는 막연한 생각만을 갖고 있는 것은 다르지가 않습니다.

 

 

부활을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한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현대 교인들에게 부활신앙은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과 연결해서 드러납니다. 이것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만약 이 내용을 ‘신자는 세상의 것 말고 위의 것, 즉 천국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본문의 겉만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좀 더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2장에 보면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세상적이고 종교적인 여러 가지 습관에 매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8절에 보면 철학이 그것이었고 11절에 보면 할례가 그것입니다. 또한 16절에 보면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의 문제로 서로 비난하는 다툼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규례에 묶여 있기도 했고, 그러한 규례에 순종하는 것이 곧 겸손과 경건으로 이어지는 신앙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러한 것을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신자는 더 이상 종교적인 그 어떤 규범에도 매인 존재가 아니고, 또 어떤 규범으로도 신자를 죄인으로 정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믿는 십자가는 승리의 증거입니다. 승리의 증거물인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신자는 이미 죄에서 해방된 존재이고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무엇으로도 정죄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골로새 교회는 먹고 마시는 문제,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 문제로 서로를 비난했고 다투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기신 십자가의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 이유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겸손해지고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이고 결국 종교적 규범과 질서에 구속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현대 교회의 실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종교적인 규범과 질서에 구속되어 살면 외형적으로는 신앙이 있고 거룩하고 겸손한 자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것으로도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골 2:23).

 

 

육체 따르는 것이란 육체적 욕망을 의미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육체적 욕망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성취함으로써 좀 더 높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이 종교적 규범과 질서에 순응하여 자의적인 거룩과 겸손을 이룬다고 해도 제어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겸손과 거룩을 이루기 위해 애쓰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승리하신 증거인 십자가를 믿는 신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신자의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겸손과 거룩을 나타내기 위해 종교적 규범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은 자에게 따로 나타내야 할 거룩은 없습니다. 주와 함께 죽은 신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으로 거룩된 자로 여김 받는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1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도 역시 신자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이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위의 것, 위의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요? 위의 세상을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위의 세상, 즉 천국을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실제적 장면으로 상상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위의 세상과 지금 현재가 연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도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이것을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천국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천국이 어떤 것인지 천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 천국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그저 막연한 상상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세상은 위의 것입니까? 땅의 것입니까? 많은 사람은 세상을 땅의 것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의 것은 하늘, 즉 천국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땅의 것과 위의 것을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과 신자가 장차 가게 될 천국으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음을 믿는 신앙이 현재의 삶에 연결되어 나타나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위의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한 우편은 단지 좌우편이라는 방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시에 우편은 그 주체와 동일한 권한과 능력이 부여된 자리로 여겨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권한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하나님과 하나 된 분으로 존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과 능력은 다스림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다스리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위의 것을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세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바로 위의 것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땅의 것은 예수님께 미음을 두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가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도는 3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신자의 본질입니다. 세상에서 죽은 자인 신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지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 있는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에는 고상한 지식이나 종교적 규범에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경건이나 거룩도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서는 전혀 가치있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대해 죽은 대신 다른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얻었기에 이 생명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생명을 드러내는 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며 현재입니다. 이 생명이 고상한 철학적 지식과 종교적 규범을 지키면서 뭔가를 금하고 행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가 서로를 비난하게 하고 다투었던 문제들은 결국 아무 유익도 없는 헛된 것이었음을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실체이시고 능력이십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절)라는 말대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남으로써 감추어졌던 생명의 신비가 생생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는 이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생명의 신비가 드러날 그 때를 소망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자의적인 겸손과 거룩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문제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다툴 일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신자에게 감추어진 생명의 흔적입니다. 자기의 존재 가치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이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은 부활의 생명에 마음을 둡니다. 이것이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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