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08 12:52

(부활절)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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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35-44http://onlycross.net/videos/1co-15354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설교>

 

◉ 과학의 한계 ◉

 

부활은 현대인들에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취급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부활을 죽음 이후에 있을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현대인의 관심이 현재의 삶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을 믿지 못하고 부활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부활의 상태와 천국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깊은 공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현대 사회가 과학이 발달해가면서 인간의 사고 또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거나 비과학적인 일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현재의 삶에 도움이 되는 말과 일에만 관심을 두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인생에 대한 지혜일까요?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현대 과학이 인간의 질병이나 노화에 대해 연구하며 노화를 늦추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를 하고 있지만 죽음의 문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일 뿐입니다.

 

 

과학이 다룰 수 있고 과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 대해서일 뿐이지 영의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도 답을 내리지를 못합니다. 부활, 즉 생명의 문제는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무시한다면 그것은 과학을 신으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은 분명 과학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인간을 사망 아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부활도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 부활에 대한 의문 ◉

 

35절에 보면 사도가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당시 고린도의 사람들 중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또 어떤 몸으로 오느냐?’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단지 부활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도무지 과학적 사고에 맞지 않는 부활의 허구성에 대해 드러내려고 물었을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헬라 문화는 철학적 사고를 말합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고입니다. 이러한 헬라 문화의 시각에서 볼 때 부활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허구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 구원 또한 미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형틀에 내어 맡겨 비참하게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는 방식이 자칭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헬라 문화의 사람들에게는 마치 ‘인신제사’처럼 여겨졌을 수 있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자신의 죄가 누군가의 대신 죽음으로 인해서 모두 용서 되고 구원 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이며, 이 같은 논리에 빠지게 되면 사람을 죄에 대한 방종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염려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에 젖어 있던 고린도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었고, 부활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허구적인 주장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죽음이 삶의 끝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것 까지가 전부였기 때문에 부활이란 지금까지 발생하지도 않았고, 또 발생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바울은 어리석은 자로 말합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이 모든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영의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에 빠지고 철학에 빠지고 지식에 빠져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계를 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 씨의 뿌려짐과 부활 ◉

 

바울은 이들에게 씨를 가지고 부활을 증거합니다. 36-38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씨가 땅에 뿌려지면 씨의 형체는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의 모습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그 몸이 죽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이러한 비유도 과학과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 것과 씨가 뿌려지는 것을 같은 의미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씨가 뿌려지는 것은 씨눈이 자라서 싹이 되어 새로운 형태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 씨가 죽어 다시 살아난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것은 생명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씨는 땅에서 생명의 활동을 계속하게 되지만 사람이 죽는 것은 생명 활동의 완전한 멈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씨가 뿌려지는 것과 사람이 죽는 것을 같은 의미로 말을 하는 것은 사도가 죽음을 생명 활동의 완전한 멈춤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는 사도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신자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자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님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는 것은 겉으로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생명의 활동이 계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생명 안에 있는 것이기에 비록 육신의 생명 활동은 끝났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씨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은 생명의 영역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육신이 죽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롭게 사는 길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과학과 이성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고 증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곧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보다는 죽음을 더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은 우리가 늘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심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지만 생명의 문제는 우리가 경험할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한 소망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계속되지 않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신자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께 좋은 것, 힘이 되는 것,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잠시 잠간 후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래서 육체에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가 이 사실을 알았기에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생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믿음이 죽음 또한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 부활의 몸 ◉

 

사도는 또 부활의 몸에 대해서도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씨가 뿌려져서 다른 형체로 살아나는 것처럼 부활의 몸 역시 현재의 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부활의 몸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지금의 육신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약해지고 병들기도 하고 결국 사라질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육신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습니다.

 

 

 사 40:6절의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는 말씀처럼 젊음도 아름다움도 계속 되는 것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이 삼 십년 유지하는 젊음이며 아름다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늙어집니다. 그러므로 육신만을 바라보며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사는 부활의 몸은 영광의 몸입니다. 어떤 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영원히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현재의 몸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없으며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결됩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인해서 인간이 처하게 된 현실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에 붙들린 인간에게 소망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부러워 할 세상의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 부럽습니까? 돈을 가진 자가 부럽습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부럽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자가 부럽습니까?

 

 

그런데 돈과 권력이 가진 자들을 기쁨과 평안으로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들이 가진 것으로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자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길에 저도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새롭게 사는 길이 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그 사람이 진실로 복된 자고 행복자인 것입니다. 항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지 확인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된 몸으로 다시 산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며 부활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죽음도 두렵지 않게 할 것이고, 담대하게 자기의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감사하며 사도 바울처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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