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7 09:42

(감사절) 믿음과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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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7-8http://onlycross.net/videos/2013111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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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설교>

 

추수감사절은 성경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에서 행해지는 행사로 여기면 되는 문제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우신 절기에 속한 추수절과 지금의 추수감사절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맥추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절기는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인간이 어떤 복을 누리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수절이나 맥추절은 곡식을 거두거나 생존을 위한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하기 위한 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의미가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왔음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후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해 죄가 용서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음을 감사하는 것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맥추절은 약속의 땅에서 수고하여 곡식을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 자체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기 때문에 첫 열매는 인간의 노동으로 인한 대가가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한 열매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에게 맥추절은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인해서 맺어진 의의 나라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수절은 수고하여 일한 것을 연말에 거두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자신들이 수고하여 일했지만 심고 거둘 수 있는 땅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어린양 희생 덕분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거두고 누린 모든 것이 어린양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추수절에서의 열매는 예수님의 피의 희생으로 구원에 이른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인해 모든 죄가 용서되고 생명의 의를 누리게 된 자신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추수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기의 참된 의미이기 때문에 지금의 교회가 행하는 절기는 성경과는 상관없는 다만 교회에서의 행사로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존은 물론 생명의 문제에서까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 하는 신자에게 감사는 당연한 본분이 아닐 수 없기에 비록 추수감사절이 교회 행사이긴 하지만 감사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 또한 유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는데, 현실은 신자에게서 감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까요? 매월 감사헌금을 하는 것이 근거일까요 아니면 교회 일에 헌신하지 않는 것이 이유일까요? 하지만 그러한 외적인 것들은 감사의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신자에게서 감사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 몸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 때문입니다. 신자에게서 표출되어야 할 감사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물론 대개의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부분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해 감격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서 죽음을 감지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죽음이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당연한 대가라는 것을 감지했을 때 나를 그 죽음에서 건져주신 그리스도의 구원에 감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자기희생을 발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 몸을 죽음에 내 던지고 대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감격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늘 자신에게서 죽음을 감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어차피 죽어야 할 자니까 그냥 되는 대로 살자’라며 세상에 대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가게 될까요? 신자는 염세주의자가 아닙니다. 신자가 자신의 죽음을 감지했을 때 알게 되는 것은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주께 마음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엡 1:5,6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신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의 본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부르셔서 아들들이 되게 하신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일은 여기에 뜻을 두고 우리에게 행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어려움과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일들, 그리고 잘못하고 잘했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들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답게 자기 몸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서 죽음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자신에게서 죽음을 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감사가 사라졌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자기 죽음과 구원을 근거로 한 감사가 아닌 자기 몸을 근거로 한 감사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무거운 짐이 지워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때때로 무거운 짐이 지워지고 그 짐을 지고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해결하기 위해 신을 찾게 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향하게 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때를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것을 경건과 거룩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미혹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곰곰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갔던 사도들 중 어느 누구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형통한 삶을 산다는 말을 했습니까? 아예 신약 성경에 형통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교회는 ‘형통’이라는 단어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에만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싸움은 자기 몸이냐 신자의 본분이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본분은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겪는 세상에서의 어려움도 신자의 본문을 근거로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사도들의 믿음을 본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믿음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을 요구한 그들이 어떤 믿음의 길을 갔는가를 살핌으로써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삶에서 공통적인 것은 세상이 말하는 형통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두가 고난의 길을 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것은 고난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자신이 한 일로 인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무익한 종으로만 존재했을 뿐입니다.

 

 

신자는 사도들의 이러한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은 우리를 이러한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믿음을 빌미로 형통을 기대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형통한 삶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자의 감사는 형통한 삶과는 상관없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던 내가 하나님이 거저 베푸신 은혜에 참예하게 되었음을 근거로 할 뿐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신뢰할 만한 것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며 영원한 죽음에 갇힌 우리를 건지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러한 믿음에 무슨 보상이 있고 형통이 있겠습니까? 굳이 믿음으로 인한 보상과 형통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의로운 자라 여김 받는 것이 보상이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고 있는 것이 형통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을 빌미로 육신의 부족한 것을 더 채우고자 하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구원으로 인한 진정한 감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늘 자기 몸에 대한 관심에만 집중한 채 복과 형통만을 추구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감사가 사라진 채 살아가는 삶의 실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1장에서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러한 삶에 대한 불만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삶에서도 바울의 마음은 교회를 위한 염려로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바울을 이런 사람 되게 한 것은 복음의 가치와 존귀함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에 자신이 어떤 고난에 있든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염려로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을 본받기 위해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자신에게서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고 구원의 감격과 함께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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