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5 13:45

(성탄) 목자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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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8-14http://onlycross.net/videos/2011(성탄).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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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설교>

 

성탄은 하나님께서 멸망의 존재로 세상에 머물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을 뜻합니다. 인간은 대개 신을 멀리 높은 하늘 어딘가에서, 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한 어딘가에서 인간을 지켜보고 계시거나 착한 자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는데, 성탄은 낮고 천한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죄악 속에 뒹굴며 살아가는 우리를 더럽다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붙드시고 간섭하시면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큰 위로를 받게 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힘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만약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라면 신앙의 삶은 참으로 힘들고 피곤하고 고달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고스란히 지켜야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의 고달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탐욕과 갈등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오셔서 그 모든 더러운 것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건지시고 자유케 하신 크시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해야 하는 은총의 사건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탄을 이러한 은총의 사건으로 바라보며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다만 성탄이라는 날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지금의 세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성탄을 얘기하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라는 은총의 사건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시고 하나님의 낮아지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높임 받게 되는 대 역전을 가능하게 하신 성탄의 사건에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상식에 부합되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이라며 섬깁니다. 수십 년 아닌 평생을 교회를 출입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여기저기서 예수님의 탄생을 얘기하는 소리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악하고 더러운 우리를 친히 찾아오셨다는 근본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벌을 주고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복을 주지 않는 아주 이상하고 쩨쩨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기는 사람들의 공허한 놀이일 뿐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기 즐거움을 위한 놀이로 그쳐버린 것이 지금의 성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성탄을 경험한 목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목자들은 밖에서 양을 지키며 밤을 지내다가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 가운데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천사의 외침을 듣게 되는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우리를 위한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만족이 될 수도 없기에 구원은 절대적으로 블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할 구주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소식이 천사들을 통해서 목자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목자들의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췄을 때 크게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무서워하게 했을까요? 주의 영광이 비췬 모습이 공포스러웠기 때문일까요?

 

 

주의 영광을 대할 때 인간이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무서움입니다. 이것이 주의 영광을 대한 인간의 정직한 반응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주의 영광 앞에서 인간은 악하고 더러운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고백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구원 밖에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구주가 오셨다는 소식이야 말로 천사의 말 그대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우리의 심령에도 깊숙이 들어와 자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주가 나셨다는 이 소식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이 기쁨이 성탄과 우리들의 신앙에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탄의 소식을 듣는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집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 스스로 자신을 채우고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도 내 자신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주가 나심으로 이제 우리는 내 스스로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구주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에게 함께 하셔서 내가 채워지는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주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쁨이며 만족이 되시고 충만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노력을 앞세울 때는 항상 부족하지만 구주가 함께 하신 신자에게 부족함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가 하나님이 찾아오심은 놀라운 은총의 사건일 수밖에 없으며,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우리의 심령 깊숙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말합니다. 구주가 나신 사건에서 목자들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그저 가서 구유에 누인 아이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의미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일 뿐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구유가 있는 곳은 냄새나고 더러운 짐승의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나셨고 거기에 뉘어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낮고 천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목자들이 가서 구주를 보게 된 그곳은 짐승의 구유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게 될 수 있는 곳은 냄새나고 더러운 곳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그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싼 옷으로 겉을 치장하여 화려하고 깨끗하게 보인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은 냄새나고 더러운 시궁창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보려면 냄새나고 더러운 내 마음 속 깊이 내려 가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나셨다는 것 또한 은총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유가 아니라 깨끗하고 거룩한 성전과 같은 곳에서 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보기 위해서 내 속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써도 거룩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내 속의 상태를 보게 될 때마다 실망하고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구주가 구유에 나셨다는 것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은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유에 누인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보기보다는 나를 봅니다. 나에게 집착한 채 내가 얼마나 신앙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선하고 착한 사람인지 자신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을 보면서 자신이 영광스런 존재로 드러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목자들의 성탄 경험은 오늘 우리들의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의 사건은 이천년 전 먼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물리학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나 물리학적인 시각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일회로 끝났습니다. 더 이상 동일한 사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 의미에서 예수님은 오직 한번 세상에 오셨고 한 지역에서 한 세대만을 사시다가 하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십니다. 수많은 신자들의 심령에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탄생하십니다. 이렇게 오늘날 참된 성탄은 우리 영혼에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탄생하시는 그 자리는 앞서 말한 것처럼 냄새나고 더러운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냄새나는 심령의 실체를 깨닫게 하시고 냄새나는 그곳에서 함께 하시는 구주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의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인식할 뿐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탄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경험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가령 성령의 잉태된 동정녀 사건을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하지만, 오늘날 신자의 탄생은 분명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자 여자라는 인간관계를 통해 나지 않으신 것처럼, 신자의 탄생 또한 인간적 관계와는 전혀 무관한 채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신자의 탄생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그 의미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시끄러운 행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구주 그리스도의 나심을 수백 수천 개의 트리로 장식하고 축하하는 것보다는 한 영혼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탄절에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탄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령에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시고 그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는 일을 쉬지 않고 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목자의 경험은 오늘 우리들의 경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탄의 사건은 역사에 묻혀있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 같이 여러분의 심령에서 경험되어야 할 사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심령에 자리한 예수님을 보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냄새나고 더러운 구유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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