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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22-24http://onlycross.net/voice/070408(부활).mp3


<본문>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사도행전 2:22-24)


<설교>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은 인생의 가치를 죽음을 전제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펼쳐질 모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에서 어떤 영광과 영화를 누렸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죽음까지입니다.

 


죽음 이후에 그 이름이 세상에서 칭송받고 기념관이 건립되고 그 업적을 널리 기린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세상과 단절된 죽은 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죽은 자는 이미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어떤 영화와 영광을 누린다고 해도 그 기간은 육신이 숨을 쉬고 있을 때까지입니다. 길어봐야 100년 안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사태는 영원토록 계속되어질 결과로 다가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서 자기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불만을 가지면서 지금보다 더 가치 있는 자신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이 슬픔과 아픔으로 다가올 리가 만무합니다. 오히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린 채 여전히 자신을 위한 삶에 몰두하고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돈이 없으면 슬퍼하고 아파합니다. 남들처럼 힘이 없을 때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며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상에 구주로 오신 예수님이 자기 인생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않고, 예수님이 없는 자기 인생에 대해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인간이면서도 죽음에 서서 인생을 평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긴 죽음에 서서 인생을 평가해 본다고 해도 성령이 함께 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서는 다만 인생의 허무와 헛됨을 잠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예수님의 참 제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참 가치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두는 것이야 말로 참된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참된 신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였다면 자기 인생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죽음을 극복하였다는 것은 ‘나는 지금 죽어도 마땅한 존재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어도 마땅함을 인정한다면,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모든 상황과 입장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에 대한 신자의 믿음은 현재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즉 부활과 현재의 삶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행한 최초의 설교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초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의 신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가 누구이고 어떤 직분을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교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와 신자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부활에 있어서 신자의 문제는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 보다는 부활을 잘못 믿는 것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부활을 잘못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의 시기와 모습, 휴거, 대 환난, 적그리스도, 천년왕국 등에 관해 잘못된 견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믿음이 현재의 삶과 직결되어 있지 못하고 항상 별개의 문제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믿는 믿음이 현재의 삶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왕의 아들로, 그것도 장남으로 태어난 왕자라면 장차 왕이 될 것은 보장된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그 왕자에게서 두 가지 유형의 생활양식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차피 왕이 될 것이니까 편하게 놀고먹는 것입니다. 반면에 왕이 될 것에 대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훈련을 쌓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왕위를 이을 왕자의 신분이라는 것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나쁜 영향을 준 것입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왕자의 신분이 그의 삶을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훈련을 하는 기회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경우를 놓고 본다면 그리스도와 신자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신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전자의 경우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믿음을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고한 보증으로 여기고 죄에 대해 감각이 무뎌지거나 마음 놓고 죄를 지으면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부활이 신자에게 그 이전의 삶 즉 이 땅에서의 생활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이 세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양 다리를 걸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은, 이 세상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가치의 세상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믿음은 세상의 삶에 분명히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을 소망하기에 이 세상에서 살고 죽는 것이 문제 되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서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무슨 고민거리가 되겠습니까?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영생을 소망함을 뜻합니다. 영생을 소망하는 신자에게 이 세상은 성경 말씀 그대로 잠시 잠간 머물다가 떠나는 곳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영원한 장막은 하늘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진짜 인생은 천국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에 이 땅은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실습장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의 이 땅의 삶이 왕자로서 사는 것이라면 천국에 가서야 왕으로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왕이 될 것을 대비해서 살아야 합니다. 아니 왕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의 보상으로 천국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천국의 삶을 이 땅에 갖고 와서 천국에 갈 사람이 아니라 천국에 가 있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에 관한 인식은 이 땅에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이 끝나면 천국의 보상이 기다린다는 차원에만 머뭅니다. 더 이상 눈물과 한숨이 없는 낙원에서 영원토록 편안하게 살 날을 막연하게 바라보는 것이 부활과 영생을 믿는 믿음의 수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고생을 해도 참고 견디자는 것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신자가 고생한 것을 다 갚아 주실 것이라는 보상의 차원에서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천국을 단지 도피성으로 여기는 것 밖에 안됩니다. 마치 “결국 나중에 누가 잘 되나 두고 보자. 너희는 지옥 가지만 나는 천국 간다!”는 식입니다. 불신자에 대한 그런 복수 심리까지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좋은 세상을 천국에서나마 마음껏 누리며 한을 풀겠다는 기대 심리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을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곳으로 상상을 합니다. 또한 한 평생을 질병으로 고생한 사람은 질병이 없는 천국을 상상하게 되고, 몸에 장애를 가지고 힘들게 산 사람은 멀쩡한 몸으로 부활해서 들어가는 천국을 상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믿음이 세상에서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부족한 것을 부활과 영생으로 보상받겠노라고 작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힘들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천국의 삶의 훈련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이 어떤 나라입니까?천국이 세상과 다른 것은, 죄가 없는 나라라는 것만이 아니라 재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자가 힘을 가지고, 없는 자는 멸시를 받는 것이 없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믿고 소망하는 신자라면 이 땅에서부터 죄를 멀리하는 훈련뿐 아니라 재물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물 자체를 아예 소유하지 말라든지 돈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선 재물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신자의 삶 전체를 좌우할 만큼 영향을 받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부활의 몸으로 들어갈 천국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섬기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신자는 그런 세계와 삶을 장래 일로 막연하게 소망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삶의 방식을 이 땅에서 살아가며 맛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의심 없이 잘 믿어서 장차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신자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믿음에 의해서 세상에서의 삶이 점차 바꾸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치가 신자가 존재하는 곳에서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재물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즉 부활을 믿지도 소망하지도 않는 자들과는 경쟁에서 당연히 뒤처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을 이미 소유했기에 재물에 의해 더 이상 기쁨과 만족이 좌우되지 않으므로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감사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달픈 현실이 육신적 불편은 될지언정 결코 영적인 고통과 불만으로 연장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의 고달픈 삶 자체가 신자는 세상을 떠날 나그네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며 천국을 기꺼이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 부활이 없으면 신자가 더욱 불쌍하지만 부활이 있으면 오히려 불신자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뿐입니다. 이 세상이 인간에게, 특별히 신자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동안의 필요한 것만 공급할 뿐입니다. 죽을 때 남는 것은 집, 자동차, 돈, 본인의 육신도 아닙니다. 오직 영혼뿐입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사라질 것에 불과한 것의 영향을 받고 산다면 그보다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신자가 영생을 소유한 자로, 이미 부활을 입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신자의 부활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미 확보된 부활이 이 땅의 삶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쳐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고하는 중심, 바라보는 목표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영원과 이어진, 아니 이미 영원한 존재가 된 자가 일시적인 가치에 영향 받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와 신자의 부활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없는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하고 작게만 여겨집니까? 힘이 없다는 것이 슬픔과 아픔으로 다가옵니까? 남들처럼 살지 못한 것 때문에 실망이 됩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을 믿는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부활의 믿음은 결코 신자를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부활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활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재확인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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