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5 09:28

직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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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6:1-6http://onlycross.net/videos/2015021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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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설교>

 

본문은 초대교회의 분란으로 시작합니다. 분란의 원인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열두 사도는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않고 교회의 제자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집사를 세운 목적이 구제를 아무런 문제없이 효과적으로 잘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여 불화하지 않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집사는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의미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도가 집사를 세워서 구제의 일을 맡기고자 한 이유를 알기위해 먼저 구제의 의미부터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제는 물질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구제는 그 의미를 달리합니다. 단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증거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출 22:21-23절을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있었을 때는 과부나 고아처럼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약자의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애굽 땅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고 기업으로 받게 된 것 역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등장시킨 것이 과부, 고아, 나그네입니다. 이스라엘이 과부, 고아, 나그네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망각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약자를 돌보지 않거나 무시하고 조롱한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 존재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잠 17:5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은 가난한 자를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신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구제는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가난한 자가 넉넉한 자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는 차원을 넘어서서 구제 받는 사람이나 구제 하는 사람 모두가 과부와 고아와 같은 처지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도움이시고 나를 존재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도덕적 의미의 구제는 구제 하는 사람과 구제 받은 사람의 차별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성경적 의미의 구제는 오히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동일한 위치와 존재의 자리로 끌어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제를 하는 사람은 구제를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구제를 받는 사람은 단순히 어려운 형편에서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가 매일의 구제에 빠진 것으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면 그것은 구제를 물질적 도움을 주고받는 것으로만 여겼다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돈에 마음을 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제를 통해서 인간의 죄가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적 의미에서 구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열두 사도가 집사를 세운 이유가 단지 구제로 인해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집사가 할 일이라면 집사는 행정과 사무에 밝은 사람이 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헬라파 히브리파를 따지지 않는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택하여 구제의 일을 그들에게 맡겼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히브리파 유대인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요? 헬라파와 히브리파 모두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을 지칭하는 헬라파가 발생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연관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남이스라엘, 즉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남북 이스라엘 모두가 멸망하면서 자연히 유대인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고 다른 나라로 피신하기도 하고 황폐하게 된 이스라엘에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도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사람으로, 여러 곳으로 흩어져 유대적 종교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며 살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 출신의 유대인들을 헬라파 유대인으로 지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본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유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구제 사업이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구제 활동은 유대교 내에서도 있었는데 일정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주 금요일마다 열네 끼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하는 방식과 또 하나는 방랑하는 낯선 빈민, 즉 나그네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매일의 구제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교회에서의 구제는 매일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제에서도 유대 사회도 동일하게 헬라파 과부가 소외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헬라파 과부가 구제에 빠지는 일이 없이 잘 챙겨주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불평과 불만을 잠재우는 것일 뿐 헬라파와 히브리파라는 벽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은 교회에 헬라파와 히브리파라는 벽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음을 예수께 둔다는 것은 생명의 문제에서는 헬라파, 히브리파라는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즉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제시하는 신앙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당시 구제가 이러한 기준에 의해 행해지지 못했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집사로 세워 사도가 증거하는 복음의 기준에 의해 구제를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씀으로 복음의 정신과 기준을 바르게 증거하고 집사는 사도가 증거하는 복음의 정신과 기준에 의해 봉사함으로써 교회가 오직 복음으로만 소통되는 관계에 있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집사를 안수하여 세운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에 존재하는 직분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직분을 교회 일을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은석교회가 그런 취지에서 직분자를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집사나 권사로 세움 받는 분도, 그리고 투표하여 직분자를 세우는 여러분들도 교회를 위한 일꾼을 세운다는 생각은 접어야 합니다. 적어도 사도가 집사를 세운 이유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신다면 직분은 사도가 전한 복음의 정신과 그 기준으로 더욱 깊이 들어감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가 직분에 대한 계급적 의식입니다. 권사, 집사, 장로, 목사 등의 모든 직분이 서로 수평적 관계에 있음을 망각하고 수직적인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직분자와 직분이 없는 성도 모두는 한 몸의 관계로 수평적 소통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딤전 3장에 보면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읽어 보면 과연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일까요? 아마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 감독으로 세워지고 집사로 세워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어떤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고 전하기 위해서 세움 받은 것이 감독과 집사 등의 직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딤전 3:11절에서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하지만 과연 이러한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있다면 그는 전적으로 복음에 붙들렸다고 할 수 있고, 그런 분이라면 사도가 말한 기준에 해당된다고 해도 ‘나는 자격이 있다’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정리하자면 직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정신을 망각하고 복음의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교회의 유익을 위한 직분자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에게 저주가 되는 직분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의 정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께 용서 받아야 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에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자신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종신과 기준에 머물러 있는 직분자의 자세입니다.

 

 

직분을 맡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직분을 맡았으니 일을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분을 교회 일을 하는 자리로 이해한다는 것이고 결국 복음보다는 교회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복음의 정신을 망각하고 교회 일에 앞서게 되는 그것이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직분자는 서로가 동역자입니다. 모두가 복음을 위한 봉사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의 역할은 다르겠지만 복음을 위한 도구로 봉사자로 부름 받았기에 동역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높고 낮음의 구분이 있을 수 없으며 지시를 하고 지시를 받는 계급적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나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겠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직분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네가 집사냐”“네가 권사냐”라는 비웃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비웃음을 받는 것이 옳고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직분이 나에게 비웃음이 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못하고 자격이 없고 부족한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직분은 신앙이 더 낫다는 확인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집사와 권사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를 했지만 과연 복음의 시각에서 진심으로 교회에 유익이 될 사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복음보다는 내 가족이기 때문에, 나와 친하기 때문에 투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분자를 뽑기 위한 투표는 투표하는 사람의 죄도 드러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투표를 한 사람도, 투표를 해서 장로, 집사, 권사로 선출된 사람도 부족한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직분은 자격이 없는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로 드러내고 전하는 도구로 세우신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직분자에게 요구되는 정신입니다.

 

 

직분자로 선출되지 못했다고 해서 섭섭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직분이 있든 없든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동일한 관계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집사로 택하여 세웠다는 것은 믿음에 뛰어난 사람을 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를 바라보고 주의 간섭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굳이 직분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내용입니다. 직분이 예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직분자로 세워지는 분들은 물론이고 모든 성도가 이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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