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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6:1-11http://onlycross.net/voice/080323(부활).mp3


<본문>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로마서 6:1-11)


<설교>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사건이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을 단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성경 속의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비록 매년 부활절이 되면 모든 교회들이 여기저기서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며 부활을 외치지만 그 모든 것이 연중행사로 그쳐버리는 것도 일 년간 잊고 있었던 부활에 대한 내용을 부활절을 기회로 다시 기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은 죽은 몸 즉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나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부활한다는 막연한 미래적 기대감을 갖는 것으로 부활을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자에게 새 생명에 대한 소망을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진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부활 또한 진지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생명은 우리의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켜 주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새 생명에 대한 소망도 갈망도 상실된 채 부활은 나중의 일로 밀쳐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라면 분명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고 신자로서 정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것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삶에서 여러분이 목격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목말라하고 갈망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육신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신을 향한 욕망이 멈추지 않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몸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즉 죄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죄에 붙들려 있는 자신의 현실을 자신의 삶에서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고,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처럼 죄의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즐겁습니까? 즐겁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돈이 많지 않아서, 그래서 원하는 것을 할 수도 가질 수도 없어서 즐거움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 심령이 깨어있는 신자라면 죄의 몸으로 죄에 붙들려 살아가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애통해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이러한 괴로움과 애통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추구하고 갈망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새 생명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부활의 세계이기 때문에 신자는 자연히 부활을 갈망하면서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신자입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문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말을 합니다.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은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부활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5절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10,11절의 말씀으로 설명되어집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라는 말의 의미를 안다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감각, 즉 죄를 향한 악한 속성 자체가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죄에 대한 감각 자체가 죽은 것이라면 신자는 그 어떤 죄도 보여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전히 죄에 붙들려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신자라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을 구실 삼아서 죄에 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즐길 수 없는 사람이고, 죄에 대해서는 애통해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은혜를 핑계 삼아서 죄에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죽은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를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싸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에게 죄는 곧 원수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죄를 즐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에 대해 싸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끌려가는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함을 목격할 때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고 애통해 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새 생명의 세계, 즉 부활의 세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부활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신자를 강하게 붙드는 소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죄에 대하여는 죽었지만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되어진 새 생명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이 곧 새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죄로 인해 죽을 몸에 불과한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이 나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임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스스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능력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신자가 어떤 존재이며 또한 신자의 자랑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게 됨으로써 땅의 것이 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힘이 되어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산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면 자연히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돈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이 힘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의 영역 안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세상에 우리의 소원을 두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의 배부름과 풍부함이 힘이 아니며, 나를 궁핍하게 하고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 신앙을 방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 너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4:11-13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에게는 세상이 능력이 아니라 능력되시는 분이 따로 계셨기 때문에 배고픔과 배부름, 궁핍과 풍부함이라는 어떤 형편에서도 그것으로 신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능력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신자의 소원과 자랑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원과 자랑을 세상에 둠으로 인해서 신자들이 전혀 영적이지 않는 일에 아우성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옛 사람이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죄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의 길을 가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 의의 길을 가야할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에 있는 신자 됨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소원할 것도 예수님이 가신 의로운 길이지 세상을 자랑거리로 삼는 죄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러한 신자 됨을 다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로서 여러분이 달려가는 길이 무엇에 소원을 두고 있는 길이며, 무엇을 자랑으로 삼는 길인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 아래 있었을 때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자신의 자랑을 위해 항상 이웃과 경쟁하고 비교했던 악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길을 가지 않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산 신자로서의 새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자랑과 기쁨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답게 신자에게 주어진 영광과 승리와 자랑을 여러분의 것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며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복된 신자의 길입니다.

 

(200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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