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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 신앙은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행위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구원은 은혜로 받되 구원 받은 자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말하기도 합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의 행위도 모든 사람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의 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 또한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논리로 따진다면 상급의 차등이 있다는 것이 맞습니다. 행위가 동일하지 않고 수고와 열심 또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수고와 열심에 따라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이 행위론의 시각에 맞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천국의 속성은 세상의 자본주의 논리와 다르지 않게 되고, 세상의 차별의식과 계급의식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됩니다. 즉 천국의 속성과 세상의 속성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상급을 말합니다. 하지만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급에 차등이 있되 차별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마 상급의 차등을 말함으로써 마치 천국에 차별이 있다는 인식을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누가 들어도 천국에 차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니까요.


하지만 차등이 있되 차별이 없다면 굳이 차등을 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차등이란 높고 낮음의 차이를 뜻합니다. 높고 낮음의 차이는 이미 차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차등을 주장하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상급에 차등이 있다면, 상의 종류가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서 상을 여러 가지로 언급하는 내용을 본적이 없습니다.


상급은 창 15:1절에 처음 언급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은 상급을 하나님 자신으로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상으로 주신다고 해도 ‘하나님이 상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여되어 하나님이 상이 되어주시는 복을 누린다면 그것은 죄에서 해방되어 거룩한 의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에서 해방된 것은 하나님이 아들의 개입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 등장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됩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있어서 상급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에 속하게 된 것이고, 이 상급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급의 내용에 차등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신자인데 또 다른 무엇을 기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차등을 주장하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상급의 차등이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일꾼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마 20:1-16).

이 비유에 보면 각기 다른 시간에 부름을 받고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이 등장합니다. 각기 다른 시간에 부름을 받았다면 일한 시간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 부름 받은 일꾼은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에 비해 일한 양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일한 시간에 따라 받는 삯이 달라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계산 방법이고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을 공평한 계산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애초에 약속한 품삯대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하게 지급합니다. 그래서 일찍 와서 일한 일꾼들이 주인에게 공평하지 않다고 원망을 합니다. 이것이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 그대로입니다. 일한 만큼 다르게 받는 게 옳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약속한 대로 주었기 때문이고, 나중에 온 일꾼도 먼저 온 일꾼과 동일하게 지급하는 것은 오직 주인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 일꾼이 잊은 것은 주인이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그날은 굶어야 한다는 자기 처지입니다. 자신의 차지를 잊지 않았다면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삯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늦게 온 일꾼을 보면서 자신보다 적게 일했는데도 동일한 삯을 받는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즉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결국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불러 주셨다는 것을 잊은 채 자신이 일한 것에 관심을 두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명심한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불러주신 은혜로 감사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불러주신 은혜 안에서는 무엇을 해도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한 것이 아니기에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일뿐입니다.


이것을 롬 4:4-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주인을 원망한 일꾼은 주인에게 받은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일한 대가로 받는 삯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삯으로 여겼기에 일을 적게 한 일꾼과 동일하게 받는 것을 부당하다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온 일꾼은 일한 시간에 따라 삯에 차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러한 생각은 주인에게 받는 것을 은혜가 아닌 보수로 여긴 사고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급차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상급 차등론이 나오는 것은 일한 것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한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로 일하는 것과 일반 신자로 일하는 것이 동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것은 목사나 일반 신자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사직을 수행하는 것도 은혜 안에서고, 신자가 신자로 사는 것도 은혜 안에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차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서는 주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것이 보수가 아니라 은혜일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고 묻는 것은 제자들이 천국을 높고 낮음의 차별적 구조가 존재하는 세계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또한 상급차등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고 답하십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큰 자고 낮추지 못한 사람은 작은 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추지 못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다는 것인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18:3).


그렇다면 천국에 있는 자는 모두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 자라는 뜻이고, 따라서 천국에 있는 모든 자는 큰 자에 해당되는 것이지 작은 자가 따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속성이기 때문에 상급의 차등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그냥 어린아이일 뿐 사회적인 신분이나 위치가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 일한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 자신의 수고와 열심을 비교하면서 그에 따라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자 하는 의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되어라는 것은, 신자가 무엇을 해도 그것을 자신이 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 또한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있게 한 것일 뿐 타인과의 차별적 대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의 신자라면 어떤 위치와 신분을 가지고 있든, 또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수고와 열심이 있든 그것으로 차별적 대우를 받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결코 상급의 차등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부름 받고 주를 믿는 믿음의 세계에 참여한 것이 감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눅 17:7-10절에 보면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일을 한 후에 ‘나를 알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이 주인의 말에 따라 일하는 것이 종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에게 자신이 일한 것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의식입니다.


이 말대로 우리는 하나님께는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항상 나 중심으로 나를 위해 살아갑니다. 나에게 유리한 길로만 갑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자연히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은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열매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믿음에 의해서지 내 의지와 결단과 수고와 열심에 따른 결과가 아닙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일한 것이 없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상급의 차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상급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상급 차등을 언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급 차등을 말하는 것은 성경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원인이기도 합니다.


고전 3:8절에 보면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상급의 차등을 주장할만한 근거가 되는 구절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말한 것은 자기의 상을 받는다는 것이지 각기 받는 상이 다르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일한 대로’라는 구절을 생각하면서 ‘일한 것이 다르니까 상도 다를 것이다’라고 짐작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포도원 일꾼 비유의 내용을 다시 보면, 일꾼들은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 상을 받았습니다. 그 받은 상이 주인이 약속한 삯이었고, 그 삯은 모두에게 동일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일한 대로 받는 자기의 상 또한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3:8절은 앞부분의 내용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고전 3:5-7절을 보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합니다.


아볼로와 바울은 복음을 위해 일하지만 그 수고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아볼로에 비해서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했고 매도 맞고 죽을 고비도 넘기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아볼로는 편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볼로와 바울의 상급이 차등이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을 심은 자로, 아볼로는 물을 준 것으로 말합니다. 즉 한 일,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심은 것과 물 주는 것을 가지고 차이를 따질 수가 없고 상급의 차등 또한 따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은 사람은 심은 일을 가지고, 물주는 사람은 물 주는 일을 가지고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일한 대가에 따른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한 대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일한 것을 보시고 그에 따라 상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은 일이나 물주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심고 물 주는 것이 믿음 안에서 한 일인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 믿음 안에 있다면 믿음을 보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는 하는 일이 다르지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닐 뿐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상을 주실 뿐입니다. 때문에 상급에 차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 3:11-15절의 내용 또한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 구절 또한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라는 내용만을 가지고 각 사람의 공적이 다르게 나타나고 공적에 따라 주어지는 상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보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나고 그 날이 공적을 밝힌다는 말을 합니다.


뒤에 불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되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서 사람의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불타면, 즉 공적이 심판을 이기지 못하면 멸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공적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습니까? 과연 어떤 공적이 심판을 견디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는 공적이 있다면,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실 필요 없이 공적이 되는 행위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공적도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내세우는 공적은 심판에서 불타 없어지는 나무, 풀, 짚과 같은 것입니다. 심판을 견디는 공적은 예수님의 행하심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한 우리의 터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함께 한 신자가 바로 이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입니다.


신자가 고백할 것은 예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심판을 견디는 공적으로 심판의 날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금과 은과 보석에 해당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그 어떤 공적으로도 심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심판에서 구원 받은 것이 되고, 따라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 행함을 보면 심판에 해당될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에 자기 구원에 부끄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상급의 차등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말씀을 드릴 수 있지만 이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롬 10:2-3절을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인간의 의를 세우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로 시작하여 행위로 끝나는 것이고,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 빚진자 2010.12.06 22:18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목사님, 바쁘실텐데 이렇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성실하게 답변해 주시는 목사님의 열심에 감동했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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