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7.28 16:14

(63강) 모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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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설교>

기독교인이 신경 쓰는 것 중의 하나가‘신자다움’일 것입니다.‘어떻게 하면 신자답게 살고 신자답게 보일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다움은 선한 행실로 나타나고 증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의‘하라’는 말을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사는 신앙생활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고백이지 행위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그것은 신앙이 너무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백은 말만 하면 되기에 쉬운 일이지만 행위는 몸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고백보다는 강한 의지와 결단이 없이는 안되는 행함을 신앙으로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고백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증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면 자기의 아는 바를 따라 예수에 대한 말은 할 수 있으되 성령에 의한 믿음의 고백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성령에 의한 믿음의 고백이기에 신앙이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롬 7:22-24절에 보면“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탄식은 예수 믿기 전의 자기 상태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믿음 아래 있는 현재의 자신에 대한 고백입니다. 믿음 아래 있는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고백할 수 있습니까? 물론 말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동일한 심정의 고백이 아니라면 그것은 말 그대로 말일 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자신을 곤고한 사람으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본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도라는 직책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죄의 법에 사로 잡혀 행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자기의 죄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며, 이 고백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늘 죄는 감추고 선함을 내세워 신자다움을 보이고 싶어 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당함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이시고 구원의 능력이 되는 그리스도를 피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에 대해 고백한다 해도 위선이며 형식일 뿐입니다.

 

 

‘신자다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고백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고백은 자기의 모든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포장하고 감추고 좋은 것만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때문에 선한 행실로 신자다움을 보여주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바울의 고백에 대해서는 자연히 관심을 두지 않고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자기의 본색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사도로서의 말입니다. 자기의 본색, 즉 죄에 사로잡혀 있는 육신의 악함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하면서도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 율법 없는 자 같이 되었다는 바울의 말을‘바울의 포용력’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춰주는 것을 신앙의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해 포용력을 보여주는 것을 신앙이 있는 신자다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죄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실로 포장하여 신자다운 자신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보다 나은 자로 드러나고 싶어 하는 본성에 충실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한 것은 모든 사람을 받아주거나 맞춰주는 포용력과 무관합니다. 따라서 20절과 21절의 내용 또한 포용력을 가진 신자가 되라는 내용도 아니고 실천을 염두에 둔 내용도 아닌 것입니다.

 

 

만약 바울의 말을 실천에 의미를 두고 이해하게 되면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가령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율법 없는 자가 함께 한 자리에서라면 바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또한 설령 모든 사람에게 맞춰주는 포용력을 보인다 하여 그것을 신자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범위에 동성애자도 포함 될까요? 아니면 제외해야 할까요? 이러한 문제들이 실천에 의미를 두고 이해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입니다.

 

 

바울은 8장에서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10장에서 다시 우상 제물에 대해 말하는 것은 9장의 내용이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생각에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는 간단하고 쉽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고 거리낌이 없으면 먹어도 되고, 우상에 대한 지식이 없고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면 먹지 않으면 된다고 결론내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신자는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관계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접합니다.

 

 

여러분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나의 성경 지식과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고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지식과 자유와 권리가 이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바울이 22절에서“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바울에게 세워진 원칙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믿음은 자기 구원이 아닌 이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은사였다는 것입니다.“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는 말에서 그 의미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롬 14:1-3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 말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혹시‘신자끼리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않아야 한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러한 생각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신자가 실천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 신자가 서로 업신여기지 않고 비판하지 않아야 한다면 그것은 신자의 의지나 실천력이 아니라 서로가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만이 기준과 원칙으로 되어있을 때 비판과 업신여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서로의 믿음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모든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 먹지 않는 사람, 유대인 이방인, 율법 아래 있는 자 율법이 없는 자, 믿음이 약한 자 믿음이 강한 자 등 모두를 포함합니다. 즉‘모든 사람에게 종이 죄었다’는 말에는 믿음을 비교하고‘나의 믿음이 더 낫다’는 식의 경쟁과 비판이 없는 바울의 믿음의 원칙과 정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죄의 문제로 인해서 스스로를 곤고한 사람으로 고백함으로서 자신을 드러낸 것은 바울의 중심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다는 증거입니다. 늘 죄의 몸에 사로 잡혀 가는 사망의 몸임을 자각하면서 탄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연약한 자신을 보게 되는 그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믿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살아계십니다. 따라서 신자의 믿음이 바울의 믿음과 같다면 그리스도만 살아계시는 믿음에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믿음에 대한 비교와 경쟁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 것 또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한‘모든 것’은 모든 상황에서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대할 때는 그들에게 맞춰 행동하고 율법 없는 자를 대할 때도 역시 그들을 맞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 15:5절에 보면“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말씀이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께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는 뜻일까요?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해석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말도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문자대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도 행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로 존재합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하나의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만 존재함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능력을 받으면 바울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을 위해 죄인이 되심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해 자기를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받은 능력이 사도를 어떤 정신으로 살게 하고 어떤 길로 가게 할까요? 예수님이 능력을 주시면 내가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어처구니없는 환상의 길로 가게 할까요? 이런 환상에 붙들린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공적을 쌓고 드러내고 보여주고 싶어 안달일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비교하고 행함으로 비판하며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으로 드러나게 될 뿐입니다.

 

 

신자는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그 능력에 붙들려 삽니다. 그로 인해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이고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나도 바울처럼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일을 실천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실천이 있는 신자다운 자신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바울에게 있는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신자답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이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윤리 도덕의 시각에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은 겸손이라는 인간의 덕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가치를 복음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도 모든 사람에게 참된 가치가 자신이 아닌 복음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두고“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행한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로서의 어떤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목표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자다움이라는 자기 목표, 목적이 있습니다. 전도를 하든 구제를 하든 그냥 행한다기보다는‘신자다움’을 위한 실천이라는 자기 뜻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선하다고 생각되는 행실이 있을 때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목표를 가지고 목회라는 것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목사의 목표가 교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설교 등 모든 것이 참된 교인 만들기, 교회 만들기로 향하게 됩니다. 때문에 참된 교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지침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고 복음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하는 바울에게는 자신의 목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위해 존재하고 일하는 것 자체가 바울의 모든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서든 복음의 증거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에게 세운 목표가 아니라 단지 복음에 이끌러 가는 것뿐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사람도‘모든 사람’이고 행함도 ‘모든 것’입니다. 이처럼‘모든’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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