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6 16:45

(26강) 아들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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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4:6-7

갈 4:6-7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060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설교>

유대인은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최선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열심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에 그리스도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윗이 누렸던 영광을 회복시켜줄 메시아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기다렸지만,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위한 그리스도는 전혀 원하지도 생각한 바도 없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는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없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가능하고 자신들이 믿음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되자 예수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의 이러한 심정은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고상하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능가해 버릴 정도로 뛰어난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말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뿐더러 스스로 교회로 자청하고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결국은 사탄의 회당으로 규정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 없이 증거 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말한다고 해서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간주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인간을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죽은 자로 해석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간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물론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가 용서되고 산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살았다는 것을 의를 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벧전 2:24-25절에 보면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를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와 관계없는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죄와 관계없으니 죄를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삯인 사망과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시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즉 죄에 속하지 않고 의에 속한 자가 된 것을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단절되고 의와 거룩과 영원한 생명의 권세에 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권세에 연합되었다는 것을 생명을 얻은 신자다운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기존의 자기 지식으로 선한 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구출하여 의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의 은혜로 의에 속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힘으로 율법을 실행하여 의를 나타내겠다는 발상이 과연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에 있는 신자에게서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그러한 발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발상은 결국 예수님이 아닌 율법을 행하는 자신에게 시선을 두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이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라면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자신이 예수님께 연합되어 예수님의 의로 살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의가 되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지 의를 행하여 신자 됨을 보이겠다는 발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생각이 오로지 십자가로만 향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오신 결과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6,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롬 8:9절을 보면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모두 성령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기 다르게 호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들로 오신 예수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영을 받았다면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 마음에 연합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는 아들의 영을 받으므로 성립되는 것이지 우리의 성품이나 육신의 조건으로는 절대 불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를 믿음에 연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능력으로 사람이 되게 하셔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일까요? 이것이 성령에 대한 기독교의 변하지 않은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성령을 이렇게 해석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닌 인간의 가치에 중점을 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품과 자질을 개선하여 하나님의 일을 맡겨서 성취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고치고 개선하는 것에 하나님의 뜻이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령이 오신 이후에 인간이 어떻게 고침을 받았고 개선되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게 되면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인간에 대해 드러나는 것은 실패입니다. 그런데도 실패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설치는 것이 인간의 무지이며 그러한 인간을 책망하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7-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오십니다. 우리가 성령이 오심으로 책망을 받게 되면 나 자신을 죄로 인해 죽은 자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책망을 받으면서 자신을 율법을 실행할 수 있는 자로 생각할까요?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가능성이 있는 자로 생각할까요? 그것이 성령의 책망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인간이 추구하는 신앙은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은 허구이고 허상일 뿐입니다.

 

 

고전 1:23-24절에 보면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라면 우리의 지혜로는 절대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찾아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뜻을 이뤄주고 나의 일을 도와주는 존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지혜로 안다고 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오지 않으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알 수 없고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도 알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나의 일을 돕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 된 자를 사랑하고 아들이 잘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자신의 것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저주를 받게 하신 아버지의 심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들의 영이 없는 자가 부르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영이 없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자기가 개입하려 합니다.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셔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은 무시하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말씀을 실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지켜야 한다는 인간 방식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죄를 행하는 허물과 실수가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손상이 오고 하나님의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아들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롬 8장에서 말한 것처럼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셨고, 그 아들의 영을 받은 자 역시 모든 것을 이루신 아들 안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따라서 아들의 영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동원해야 할 것은 없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들의 영을 받은 신자에게만 가능한 자기 인식입니다.

 

 

8:15절을 보면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아들은 예수님이고 신자는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양자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참된 아들이 아니기에 아들에 대해서는 참된 아들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기에 양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참된 아들이 이루었다는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아들 될 수 없는 인간이 아들이신 예수님께 연합되어 아들로 칭함을 받게 된 모든 내막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한 혜택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것이 양자이기에 양자는 모든 것을 받은 자로 세상의 소유에 대해 아쉬움이 없이 예수님의 성취를 기뻐하고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들의 영을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이기에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길만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과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길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들이 비록 외적으로는 예수를 믿고 믿음의 길을 가려고 힘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라는 점에서 믿음이 아닌 것으로 폭로됩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길이 아님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도 하지만 그것 또한 자기 행복과 안위에 뜻을 둔 발상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쉬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고 자신의 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리고 해결을 위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열심히 찾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말을 들으면 아마그러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는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만 또한 자기에게 믿음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아들의 영이 오게 되면나는 나의 행복과 안위와 영광을 버리고 고난이 있는 십자가의 길로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접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서 계속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감히십자가의 길로 가겠습니다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무능과 연약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아들이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고 아들이 하신 일의 증인이 되는 것임을 아들의 영이 있으므로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부르는아빠 아버지는 아들의 영이 없는 자가 부르는 아버지와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하나님이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해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영이 알게 하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됩니다. 우리를 증인 되게 하신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을 받은 자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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