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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4:8-11

갈 4:8-11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081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설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은 신에 대한 우리의 바람과 이해에 반하지 않는 대상을 향한 믿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은 모든 열심을 동원하여 믿었다 해도 구원의 능력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을 근거로나는 믿는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믿음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고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십자가 등등 성경의 모든 내용이 우리의 기대와 지식과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다를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다른 믿음, 다른 복음, 다른 예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참된 것으로 알고 믿는 것은 모조품을 진품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붙들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참된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더 끌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가 전한 복음보다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말이 더 복음처럼 들린 것입니다.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이 어떻게 다르기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7,8절에서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로 구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6절에서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들로 택한 자가 있는데 그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심으로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된 자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배워서 스스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우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된 하나님의 자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남들보다 뛰어난 가치와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택함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어서 인간의 의의 행함은 무관하다는 뜻이 됩니다.

 

 

11:2절을 보면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롬 11:5,6절에서는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주의 제단을 헐어버렸다며 하나님께 고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고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과 다른 생각 다른 믿음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과 다르기에 그들의 악함이 보이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엘리야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는 선지자로서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백성으로 은혜로 택하심을 입었기에 선지자의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행위로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선함으로 여기는 어떤 행위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행위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행위에 매이지 않고 행위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지 않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은혜로 택함 받았음을 알았기에 모든 것의 가치와 존귀함을 은혜로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시고 아들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을 보내시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그 말은 아들의 영이 없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들이 아님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라는 말은 우리가 기대할 것은 우리의 헛된 열심과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은혜의 결과물로 남겨서 그 은혜로 감사하는 자녀들로 인해 영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신 바 된 하나님의 아들 됨은 받은 은혜를 활용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충성과 믿음의 실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음에도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종노릇 하게 되는 것입니다.

 

 

8:29-30절을 보면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은 모두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에 대한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행함에 따른 의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게 하고 영화롭게 할 자로 미리 정하신 자들에게 국한된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의와 선한 행실과 믿음의 행함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십자가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의롭게 하셨으니 의로운 자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의의 일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옳을까요?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 의와 우리가 생각하는 의 자체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처럼 모든 노력을 율법을 행하는 것에 기울이고 최고의 윤리를 보인다 해도 그것을 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은 의로운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의가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예수님의 원수 된 자리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지키고 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지키고 행하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증거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이 하나님이 아신 자에게 행하신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무시하고 자신의 행함으로 믿음을 이루겠다는 자기 목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의 행함으로 믿음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아들의 영을 보내사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그들은 오히려 행함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인간 됨을 미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인간을 실패자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인간을 바라보기에 의를 행하여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성을 하나님께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은 지킨다고 생각하는 자기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키기 위해 힘쓰는 정성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받아주실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지만 아들의 영이 없이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기에 그 또한 헛된 일로 규정될 뿐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게 되면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신 아들 안에서 알게 되는 하나님은 결코 말씀에 실패자인 인간을 세워서 하나님을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키고 행할 것을 명령하시고 지키고 행하는 정도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하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조작된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아버지라 부르는 미련함의 극치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들의 영이 없이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입니다.

 

 

지켜서 의롭게 되는 일에 인간은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율법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워서 인간의 실패를 보게 하라는 뜻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지 지키고 실천하여 자녀다움을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믿음이 있고 성령을 받으면 지키고 행하게 된다고 말한다면 약하고 천박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성령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아들의 영을 받았다면 우리가 지켜서 이루어야 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은 무너지게 됩니다. 흠 없이 완벽하게 완공된 건축물 앞에서 내가 완성하겠다고 삽 들고 설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흠 없이 완성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행함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의를 천박한 것으로 무너뜨리고 세상에 없던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새롭게 세워진 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아는 것은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의로움이 나올 수 없음을 아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하나님의 은혜만 말하게 되는 그들이 아들의 영으로 간섭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이 확인된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주일 성수와 십일조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믿음 없는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는 도무지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피와 함께 우리의 행함과도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로만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의 행함에는 미련 두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없다 해도 모든 것을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것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인데 이 복음을 알아듣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께 은혜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한다는 자기 발상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해그러면 아무것도 지키지 말고 행하지 말라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키고 행하는 것을 무시하고 그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의인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수고는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나 정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피로써 다 이루시고 의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신자 됨에서 은혜를 깨닫고 은혜로 감사하라는 것이 바울의 수고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생각하며 지키고 행하는 것에 시선을 두는 것은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에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키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교회는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와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자의 다툼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행함을 기준으로 한 다툼일 뿐입니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키는 것을 의로 사는 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 것을 행함을 초월한 자기 의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초등 학문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행하든 행하지 않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실패자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자신의 힘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지만 실패만 있는 가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아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정도로 반복해서 말씀드렸다면 우리의 행함을 어떤 안목과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지는 알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을 써야 한다고 하지만, 최선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는 것은 결국 행할 수 없고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이어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헛된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결국 드러나는 것은 지키고 행하여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아신 자신에게 시선을 두고 최선을 다한 신앙생활로 초래되는 결과입니다. 실패자를 실패자로 알아보게 하는 그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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