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5 17:20

(33강) 자유 있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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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4:29-31

갈 4:29-31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293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설교>

기독교에서 말하는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죄의 상태에 있을 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의지와 능력을 상실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은혜 아래 있게 하시고 죄에서 자유 하게 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자기 의지로 결심하여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가 믿음이 인간에게 능력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선을 행하게 한다는 인간의 기본 생각과 일치하기에 많은 이들이 성경적인 논리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지의 옳음을 주장하려면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신자는 자기 의지로 죄를 거부하고 선한 일만 선택하여 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협하는 말은 인간이 은혜 아래 있다 해도 여전히 죄가 남아 있기에 선한 일만 온전히 행하지 못하고 악한 일 또한 선택하고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 의지로 선과 악을 택하여 행한다는 것이고 악을 택한 결과는 결국 자신이 책임지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자유의지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은 많습니다. 가령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6,17)라는 내용을 신자에게 자기 의지로 육체의 욕심이 아닌 성령을 택하여 따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소욕이 있어서 서로 대적 하는데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리는 것을 은혜 아래 있는 신자의 의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9,20)라는 내용을 보면 인간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해도 결국 행하게 되는 것은 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에 대한 인간의 의지는 무기력한 것이며 선을 택하여 행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 또한 인간과 죄의 내막을 알지 못한 자들의 헛된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생각은 자유의지로 기울어집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고 성령이 함께하신다면 믿음과 성령이 능력이 되어 선을 택하여 행할 수 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의 영향을 받고 있기에 자신을 경계하며 부지런히 죄와 싸우면서 선한 길로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라는 내용도 우리의 의지로 죄와 싸우며 선을 행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우리를 주의 증인이 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믿음의 선한 싸움은 우리가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 붙들려 세상에서 가치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육신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높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증언의 도구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자유의지에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과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반발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존재 가치와 정당함을 구축하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당연히 믿음이 아닌 세상 종교 정신의 발로이고, 우리가 진심으로 복음을 알고 십자가 은혜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라면 인간의 종교성이 복음의 옷을 입고 흉내 내는 것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분별력은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자연히 형성되는 것이기에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 십자가로만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에 자리하시고 이끄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모든 것을 자기 의지와 행함이 아닌 은혜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 있고 성령이 함께하는 신자의 바른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믿음은 선을 행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증거되고 확인된다라는 것은 복음이 아닌 것으로 분별하는 분별력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라고 말하고, 이어서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29-31)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약속과 자유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약속의 자녀는 곧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신자의 자기 이해로 굳건히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하고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받아들이는 모든 일이 신자라는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발생하고 존재하는 것이 신자라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믿음을 인간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열심과 행함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 방식입니다. 이 약속을 따라 자녀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새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자를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시고 거룩이라는 하늘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신 구원 방식입니다. 따라서 약속이라는 하나님만의 구원 방식 안에서는 자기 구원과 선함을 위해 시도하는 인간의 모든 방식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그처럼 인간의 방식은 헛되다는 것을 알라는 취지로 주신 것이 율법인데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구원 방식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8:9절을 보면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에 대한 의미를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없는 것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인간의 선한 행실이나 믿음의 열심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다시 말해서 성령이 거하시는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택한 자녀들을 부르시기 위해 보내신 것이 성령입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것이 성령이라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 또한 우리의 열심과 바른 믿음 생활이 선한 신자로 인정받게 한다는 발상의 헛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게 되면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할 능력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한 잘못된 생각으로 자기 구원 문제로 인한 염려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세상일로 드러나는 우리의 실상은 도무지 믿음으로 산다고 자부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런 자신을 두고나는 과연 성령을 받았는가?’‘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염려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여종의 아들로 말합니다.

 

 

여종의 아들은 육체를 따라 난 자고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은 성령을 따라 난 자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서로 어떤 특징으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낼까요? 육체를 따라 났다는 것은 자기 육체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됨을 말합니다. 육체가 중심이 되고 육체로부터 생산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선한 공로로 내세우며 자랑합니다. 반면에 육체로 인해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육체를 따라 난 자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육체의 것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저울질하기에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으로 노심초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나게 되면 구원의 근거를 자신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게 됩니다. 약속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용서의 능력이 되어 거룩한 성도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새로운 안목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에게서 나타난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들은내가 못 해서’‘내가 부족해서라는 자책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죄로 가득한 자를 용서하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일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관리하시는 것으로 알기에 믿음과 구원의 문제가 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이제도 그러하다는 것은 박해받는 것이 성령을 따라 난 자가 가야 할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6,17)라는 말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약속의 자녀, 성령을 따라 난 자,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라는 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구원의 확실함을 보장해주는 의미로 들으십니까? 세상은 약속의 자녀도 성령을 따라 난 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 말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육체를 신뢰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에 의해 박해당할 자로 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고난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복음을 알고 싶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싶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저 막연하게 복음을 알면 좋을 것 같아서입니까? 그것은 착각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좋게하는 것은 없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좋게 하는 것이 있다면 복음을 전한 바울이 교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핍박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만 해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 전한 자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가는 복음의 길입니다.

 

 

고후 1:19-20절에 보면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자녀 된 신자에게는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아니오라고 거부하는 것은 믿음을 자기 육신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아니오가 없고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만 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 행함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꿈꾸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고난도 박해도 예수님에게는 성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박해받는 것보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육신의 모습에서 믿음은 내가 행해야 하는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나의 의지와 열심으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 믿음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예가 되는 이유입니다.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는 자유자입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자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자유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자를 용서하신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내가 잘하고 못하는 것에 매이지 않는 상태의 자유입니다.

 

 

문제는 자유가 우리 마음에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데 자유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유 하는 신자보다믿음 좋은 신자라는 평가를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믿음에 합당한가를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이 죄에 갇힌 우리를 피의 능력으로 용서하시고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복음이 기쁨이 되지 않는 인간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힘을 쓰면 육신의 힘든 일을 잊어버리고 십자가의 은혜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동안 그러한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문제로 항상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크게 다가오는 것이 용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는 이들이 성령의 자녀입니다.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면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한다는 모든 생각을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함을 마음에 새기시고 십자가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공로라는 것을 헛된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공로만 믿게 되는 이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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