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0:5-13>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00513.mp4
<본문>
5.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6.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7.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8.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9.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10.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돌이켜 그들을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11.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12.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13.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설교 요약>
우리는 성경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제 삶의 모습은 말씀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믿는다는 말은 자기 실상을 알지 못한 허풍이며 허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며, 세상에 마지막 때가 있다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런데 정작 삶은 마치 세상에 심판과 마지막 때가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심판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단절과 버림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깊이 집착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 다르지 않은 삶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삶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기도한다면 그 목적과 내용이 어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해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 채 자기의 뜻과 욕망을 요구하고 관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이 개인의 꿈과 목적, 그리고 희망으로 드러나고, 이것을 ‘기도’라는 종교적 형식에 담아 하나님께 전달하여 응답받으려는 시도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집착할 때, 그 집착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하면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며, 그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기도는 흔히 믿음의 행위로 정당화되어 신앙인의 당연한 실천으로 강조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보존하려는 욕망이 종교적 형태로 표출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기도를 아무런 분별 없이 단순히 믿음의 행위로만 가르치는 것은 십자가 신앙이 아닌 우상 종교적 신앙 형태에 머무는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기도의 실상을 우리는 여호사밧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엔게디까지 진군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며, 그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사밧의 고백은 ‘주는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어 어느 민족도 주의 권능 앞에 맞설 자가 없다’(6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호사밧처럼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사밧의 고백은 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여호사밧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6절)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신들과 조상들의 하나님, 즉 자기 민족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여호사밧이 고백한 주의 권세와 능력 역시, 이방 나라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힘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편에 두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현대인의 자기중심의 권세와 능력 역시 이방 나라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힘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편에 두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현대인의 자기중심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 땅의 주민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셨다고 고백합니다(7절).
그러나 이 고백 속에는 약속의 땅을 약속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시고 영광 받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과 그들의 조상에게 영원히 소유로 주신 ‘자신들의 땅’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유다 땅을 침범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자기중심적 근거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겔 36:2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라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며, 인간의 이름이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는 성경의 분명한 증언을 보여줍니다. 이 증언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자기 이름과 영광을 염두에 두고 자기를 위해 하는 기도는 우상을 향한 이방인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사밧의 기도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며, 기도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변질되어 행해지는 것으로 이방인의 신, 우상을 섬기고 있음을 스스로 나타내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계속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된 성전을 언급하며, 솔로몬의 기도를 인용하여 기도합니다(대하 20:9).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듣고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인용한 대하 6:28-31의 솔로몬 기도를 살펴보면, 솔로몬은 재앙, 난리, 견책, 전염병, 기근과 같은 상황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백성이 그 심판을 깨닫고 성전에서 간구할 때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반면, 여호사밧은 이 기도를 위기에 있는 자신들을 구원해주시는 근거로 왜곡하여 이용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셔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자신들은 그들을 대적할 능력이 없으므로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호소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을 자기편에 두고 오로지 자신을 돕고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믿으며 기도하는 이러한 태도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은 기도할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나의 편으로 믿고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기도는 받지 않습니다.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라 부르는 주의 기도를 할 수 없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나의 이름이 높임 받기를 원하고 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이름과 나의 뜻이 사라진다면 기도할 이유도 목적도 없기에 기도할 의미 또한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지만 놀라운 것은 죄로 인한 저주의 세계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아는 성도는 자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기도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