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4:4-7>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40407.mp4
<본문>
4.그 후에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보수할 뜻을 두고
5.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해마다 너희의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되 그 일을 빨리 하라 하였으나 레위 사람이 빨리 하지 아니한지라
6.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들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성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7.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파괴하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들을 바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음이었더라
<설교 용갸>
제사장 여호야다의 주도로 일곱 살에 왕이 된 요아스가 처음 한 일은 여호와의 전을 보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 여인으로 불리는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7절).
이에 요아스는 성전을 보수하기로 결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아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되 그 일을 빨리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사람들이 그 일을 빨리 시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서 어찌하여 레위 사람들을 시켜서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성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않았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아스가 거두라고 한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이십 세 이상 남자는 모두 내게 되어 있는 성전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출 30:11-16).
여기서 의문이 되는 것은,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성전 보수에 힘써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일을 서둘러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들이 성전 보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거나, 또는 그 일을 시급한 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왕하 12:6절을 보면 요아스 왕 이십삼 년이 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파손된 곳을 수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요아스가 왕이 된 지 이십삼 년이 될 때까지 여호와의 전이 아달랴의 아들들에 의해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도 수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당시 성전이 파괴되었다고 하더라도 제사가 전혀 불가능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상태였다면, 성전 제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제사장들이 그것을 그대로 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비록 성전이 파손된 상태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것에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성전을 보수하는 일에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즉 제사라는 형식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에 둔감해져 있었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요아스가 보수의 지시를 내린 것은, 제사 형식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을 통해서 유다에게 전달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아스가 거두라고 한 돈은 성전세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이 반 세겔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생명의 속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제물의 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가치 앞에서는 세상의 부요함이나 가난함이 아무런 차별도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물질의 부요로 보상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가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제사는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있음을 고백하며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사를 물질의 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제사 드렸다는 형식에 만족할 것이고, 결국 성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달랴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들을 바알을 섬기는 데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아달랴가 유다를 다스린 육 년 동안 유다가 바알 신앙에 깊이 물들어 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알 신앙은 인간이 신을 섬기는 열심과 행위에 따라 복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에서 부자는 그 믿음이 신에게 인정되어 복을 받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신에게 인정받지 못할 만큼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이것이 하나님 신앙을 은혜의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와 보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고, 유다의 신앙을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는 개인적이고 공로적인 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세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어떤 공로적 가치를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값을 반 세겔로 정하신 것은 피로 이루어진 생명의 값이 그만큼 저렴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생명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세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어떤 가치를 두거나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적 표지가 됩니다. 이러한 성전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제물의 피로 죄가 용서되고 생명을 얻은 유다는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하나 된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이방 나라와 구별되는 유다의 다른 모습이며, 성전이 성전으로 기능할 때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한 것은,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아합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합의 길을 따르며 유다를 무너뜨렸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유다의 위기가 단순히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외적인 문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각자가 자신의 열심과 공로를 내세우려는 잘못된 신앙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 진심으로 성전을 파괴하고 유다를 무너뜨리는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보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문제를 막는 데에만 머물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전 보수에 소극적이었는지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심각한 위기는 단순히 이단이나 사이비가 성행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거나 믿지 않는 이들을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찾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공로에 가치를 두는 신앙이 십자가 앞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는다는 사실에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예배라는 종교적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된 자신이 바알적 신앙에 의해 무너지고 파괴된 모습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처럼 제물의 피, 곧 예수님의 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의 보수에 뜻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생명이신 예수님의 피에만 가치를 두고 감사하며 함께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관계에 개인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