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8.1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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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19_001.MP3

 

<본문>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설교>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고린도 교회의 현재와 접목시켜 이야기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현재에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본 것입니다. 사실 바울처럼 과거의 사건을 현재에 접목시켜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나 형편 등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외에 홍해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이 신령한 음식으로 언급하는 만나를 먹은 사람이 없고, 신령한 음료로 말하는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신령한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함으로써 현재의 그리스도인도 광야 생활을 했던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5,6절을 보면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물을 마신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으로써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한 이유는 악을 즐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 얘기를 하는 것은 악을 즐겨함으로써 멸망 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본보기로 삼아 우리로 하여금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7-10절에서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에서 행했던 악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상숭배(7), 음행(8), 주를 시험(9), 원망(10)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11)는 말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본보기가 됨을 말합니다.

 

 

 

 

 

바울이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이스라엘이 비록 홍해 기적으로 구원 받고 신령한 음식과 물을 마시는 경험도 했지만 악을 행함으로 멸망 받은 것을 기억하고 너희는 악을 행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라는 교훈의 뜻일까요?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이 광야생활과 같거나 비슷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신령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즐겨함으로 멸망 받았다면 우리도 신령한 경험을 한 상태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야기가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신령한 경험을 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처럼 하지 말자라는 말이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광야와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처럼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신령한 물을 마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지금의 우리들 생활이라는 느낌이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음행으로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음행을 했다 해서 하나님이 죽이시는 일은 없습니다.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을 받은 일이 있지만 지금은 주를 시험한다 해도 뱀에게 물려 죽거나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악을 즐겨하다가 멸망 받았다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 해도 감정적 변화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위협이 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성경의 어떤 내용에 대해서도 나와는 무관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비록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해도 성경에서 듣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기분 좋은 말에만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광야 생활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러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거나 주를 시험했다하여 뱀에게 멸망 받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사백년을 생활했어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악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애굽에서도 우상 숭배했고 음행했고 주를 시험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이 사백년을 생활했는데 광야에서는 40년의 생활에 악으로 인해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생활하던 때에는 악을 즐겨하지 않았는데 출애굽하고 광야생활을 할 때 악을 즐겨했기에 하나님에 의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에 따르게 되면 멸망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애굽에서 악을 즐겨하지 않고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괜히 출애굽하게 해서 결국 멸망 받게 한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을 즐겨하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환경의 좋고 나쁨의 여부를 떠나서도 악을 즐겨하는 것은 같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도 악을 즐겨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간 일로 인해서 노역이 가중되었을 때 모세를 원망하던 것만 생각해도 애굽이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애굽에서는 악을 즐겨하는 이스라엘을 그냥 두고 보시다가 광야에서 멸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나 광야에서나 악을 즐겨하는 자였는데 광야에서 악을 즐겨하는 것으로 인해 멸망을 받았다면 이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도 멸망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며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부터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열 재앙의 마지막 장자가 죽는 죽음의 재앙에서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자의 출애굽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이스라엘도 애굽과 동일하게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으로 자리해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라고 하고, 9절에서는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멸망 받은 이스라엘처럼 하지 말자라는 말을 하지만 이것은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도 이스라엘이 즐겨 행했던 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해도 인간은 결국 우상숭배자, 음행하는 자, 시험하는 자, 원망하는 자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지만음행하면 이스라엘처럼 죽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 해석이 맞으려면 지금도 음행하는 자는 날마다 죽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죄를 짓고 악을 즐긴다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존재도 부인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자들이 죄에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입니다.‘나는 죽어야 할 악한 인간이 아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정당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본보기가 된다고 하는 의미는 우리의 생각으로 섣불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항상 현실을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얄팍한 우리의 생각에 맞춰진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는 애굽에서의 생각이 있고 광야에서는 광야에서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생각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의 생각 그대로 광야의 생활을 접함으로 인해서 애굽적 생활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면서 우상숭배를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노는 것으로 말합니다. 통념적으로 우상숭배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며 경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바울은 형상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뛰어 노는 것으로 말합니다.

 

 

 

 

 

32:6절에 보면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말합니다.

 

 

 

 

 

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아론을 종용해서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다음날 여호와의 절기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어 논 것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금송아지는 금송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자기들 앞에 자리한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는 뭔가 달랐을 것입니다. 그것이 먹고 마시며 뛰노는 것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명목으로는 하나님의 절기를 지내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기의 만족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우상 숭배라고 했을 때 우상숭배자가 아닐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음행하지 않을 자가 없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을 자 없고 원망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지 말자라는 바울의 말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똑같이 멸망 받을 자일뿐입니다.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으로 멸망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할 자들일까요? 여전히 악이 즐거운 우리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자들일 뿐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개인 세례가 아니라 모세 안에서의 단체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개인에게는 세례를 받고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확인해야 했던 것은 죽음의 존재인 자신입니다. 자신이 죽음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약속의 땅은 죽음의 존재로서 들어갈 수 없는 땅에 들어간 것이 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의 존재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타인보다 더 나은 자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바울은 우상 제물의 문제를 그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본보기입니다. 고린도교회처럼 타인보다 나은 사람으로 부각되고자 하는 것이 악을 즐겨하다가 멸망 받은 이스라엘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을 본보기로 삼는다면 우리 또한 멸망 받을 죽음의 존재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할 때에는 몰랐던 죽음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신자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존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무엇으로도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어떤 행함이 있다 해도 그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다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백성을 구별하는 기준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어린양의 피로 된 것처럼 신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알았거나 지식이 있고 실천하는 것이 있어서 된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 받음으로 죽음에서 구출된 하나님의 백성 된 은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합니다.

 

 

 

 

 

선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서있는 것이 아닌데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두가 넘어진 자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는 것이 실상인데 정작 자신이 버둥거리는 존재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가령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골라 실천하려고 힘을 쓰는 것이 넘어져 버둥거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여김 받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의 방식보다 자기 발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행함이 아닌 다른 것,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그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고 예배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기도한다 해도 그것이 나로부터 나오는 실력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내가 아닌 십자가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세계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잘남이 아니라 죽음의 존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세계입니다.

 

 

 

  • 박준희 2018.08.20 14:05
    유튜브에 동영상 안올려주시나요? 지난주에도 영상이 잘못되어 못올리셨다고 보았는데, 이번주에도 유튜브에는 안올라 오네요 ㅜㅜ
  • 신윤식 2018.08.20 17:16
    요즘 녹화에 자주 문제가 발생합니다. 장비는 이상이 없고 평일에 제가 점검을 해도 잘 되는데 예배시에만 문제가 생겨서 고민중입니다. 방송실 녹화 된것으로 작업을 하려고 하니까 되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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