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9.15 16:48

(70강) 강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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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설교>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강하심을 믿습니다. 하지만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신이시기 때문에 강하시다는 막연한 생각을 믿음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하나님은 강하시다라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19:24-26절에 보면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스스로 강한 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게 말과 생각이 다르고, 생각과 행동이 다른 것이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우리에게 나의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합니다. 신실하시고 강하신 하나님이 이루신 그 일만이 참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이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부자나 권력 있는 사람을 사귀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으로 기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사귐인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은 강한 분과의 사귐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강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을 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강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가 강한 자가 되고자 하는 악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는 신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존재인 자신이 강해지고자 하고, 자기의 강함으로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악함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진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관계에 있는 신자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귐은 곧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20절에서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귀신과 교제한다는 것은 귀신과 사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이 귀신과 교제한다고 인정할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혹 제사에 참여하고 절을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귀신과 사귄다는 바울의 말에 자신이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사와 무관하고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결코 스스로를 귀신과 교제하는 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귀신과 교제하고 귀신과의 사귐에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인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지금의 한국 교회 분위기로는 귀신과 교제한다는 것은 귀신 들린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인데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한다는 것은 성경의 내막을 알지 못하고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과 교제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하나님과의 사귐을 잘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기의 존재성에 눈을 뜨게 되고 지금껏 강해지고자 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기 뜻을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이 악함인 것을 알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귀신과의 사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우월과 존재 가치의 향상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에 있는 것을 귀신과의 사귐, 교제로 생각하면 됩니다.

 

 

2:14-16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귀를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매어 한평생 종노릇하는 것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생각하겠지만 성경에서는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귀신의 활동 무대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 했던 수많은 세월이 사실은 귀신에게 농락당하고 귀신이 활동하는 무대로 대여되었을 뿐임을 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은 자기의 존재가치입니다. 어떤 사람이라 해도 이것은 자기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고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존재 가치는 세상이 가치 있는 일로 여겨주는 일을 한다거나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는 등 다양합니다.

 

 

목사라면 교회를 확장시키고 자랑할 만한 예배당을 갖추는 것으로 자기 존재 가치를 높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나고 몇 명 남지 않은 상황이 되면 그것을 자기 존재가치의 하락으로 받아들이면서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라면 이러한 상태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교회 부흥에 뜻을 두는 것을 전혀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곧 귀신의 활동 무대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죽음, 존재 가치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귀신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무대였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로 모인다고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을 모른 자로 함께 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그 한 예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우상 제물 이야기에서 그 문제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라고 말합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상 제물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고 먹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신자 됨의 수준과 믿음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귀신과 교제하는 것으로 봅니다. 아무것도 아닌 행동일 뿐인데 그것이 자신을 신자답게 보이게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귀신의 속성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육신은 죄의 몸이고 죽음의 몸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육신을 따라 났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서 죽음을 따라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고 아담을 따라 난 모든 인간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제단에 참여하여 제물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10:14절에 보면 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화목제물 중에서 가슴과 뒷다리 부분의 고기는 백성들이 먹을 수 있도록 주셨다는 뜻입니다. 백성이 바친 그 제물을 백성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레 3:1-2절을 보면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렸을 때 드린 자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회막문에서 잡습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이 자기 운명이 제물과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면, 제물을 바친 자는 제물의 운명에서 자기의 운명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화목제물을 먹으면서 자신이야 말로 제물의 운명과 동일한 죽음의 존재임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은 죽음의 존재로 제단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누구도 가치 있는 존재로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혈과 육을 지니신 모습으로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마귀를 멸하시고 우리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된 관계에서 증거 될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죄 용서의 기쁨과 감사입니다. 그렇게 모든 존귀와 가치가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면 그 안에서 자기 존재의 가치란 수시로 부인되고 무너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난 죽음의 존재인 이스라엘은 다 함께 제단에 참여하여 제물을 먹음으로 죄 용서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쁨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죄 용서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한 몸의 관계에 있습니다. 주께서 이루신 이 관계가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문제에 의해 훼방된다면 그것이 곧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로 행세하는 것일 뿐입니다.

 

 

21절에 보면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신자가 또 다시 조상신을 모신다고 하는 제사에서 절을 할 수는 없다는 단순한 내용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이 또 다시 마음의 가벼움을 느낄 것입니다. ‘나는 제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마치 귀신의 잔을 마시지 않고, 귀신의 식탁에도 겸하여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묻겠습니다.‘여러분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습니까?’하나님의 강하심을 믿는다면서 자신이 강해지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자기의 믿음이 거짓이라는 증거입니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는 것이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나의 강함이라는 존재 가치까지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귀신과 교제하며 귀신의 활동 무대로 이용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에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16,17절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한 몸으로서 한 떡에 참여된 관계에 있습니다. 그 말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사귀고 교제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내가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죄가 용서되었음을 아는 자로 교제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사귐입니다.

 

 

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믿음 안에서 교제하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강함을 보이고자 하거나 우리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이루어진 신자의 교제이며 사귐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사귐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강하신 주가 이끄시는 대로 끌려가야 합니다. 주께서 끌어가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주를 강하시다고 하면서도 그 위에 내가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상을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하고 가치 있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먼지와 같은 것으로 보게 되면서 예수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의로우심에만 모든 희망과 의미를 두게 되는 것이 주의 강하심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주의 강하신 능력의 결과입니다. 주의 강하신 능력이 아니면 육신을 따라 난 우리가 주의 몸이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주의 강하신 능력만 믿는 것이고 모든 가능성을 주께만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나의 가능성에 눈을 돌리게 합니다. 결국 나의 가능성을 위한 힘을 구하기 위해 주를 찾고 이름을 부르게 되는 그것이 귀신과 교제하는 것임을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의 실상을 깊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주의 잔과 주의 상에 참여하는 참된 믿음인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고 헛된 것이었음을 자각하면서 믿음은 강하신 주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답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강하심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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