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9.22 16:30

(71강) 남의 유익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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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설교>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행동이 죄가 되는가 죄가 되지 않는가?’라는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죄가 되는 행동을 하면 범죄 한 것이 되고 그것은 신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되는 행동은 멀리하고 선한 행동을 가까이 함으로써 믿음 좋은 선한 신자로 존재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행동에 연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행동이 죄가 되는 것과 죄가 되지 않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라면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가 되는 행동입니다. 즉 행동을 구분해야 한다면 죄가 되는 것’‘죄가 되지 않는 것’‘의가 되는 것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이 맞습니다.

 

 

문제는 행동을 이렇게 구분했을 때 과연 원하는 행동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원하지 않는 행동은 멀리하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사람이 그럴 수 있다면 바울이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으로 한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자기 행동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이런 행동이 죄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라는 문제로 고민해 본 적이 있다면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 중심에는 죄가 되지 않는 행동으로 자기의 옳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옳은 자가 되고 옳은 자로 존재하며 옳음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보여주는 것인지 진리인 복음을 증명하고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 점에 대해서 늘 바른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신자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고 보여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옳은 것을 깨닫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문제를 다시 고린도 교회의 우상 제물의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따라서 우상 제물 역시 아무것도 아니기에 먹을 자유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 이 지식으로 우상 제물을 먹는다고 하여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식의 정당함을 앞세워 우상 제물을 먹지 못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옳음을 고집하는 것뿐입니다.

 

 

23,24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지만 유익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너희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생각하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여 그 모든 것이 남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든 것이 가하다는 자기 자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으로 자유의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자의 존재성에 대해 많은 곡해를 하고 있습니다. 신자를 신앙적으로 옳은 행동, 즉 선한 행동으로 예수를 전하거나 신자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곡해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비교적 건전한 곡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자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덕목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신앙적인 행동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바울 역시 인간의 행동에 연연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신앙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 바울의 말대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옳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신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는 항상 자신에 대해 이러한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습성은 늘 자기 확인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을 오해하게 되면 남을 돕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왠지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남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여 자기가 아닌 오로지 남의 이익을 위해 살아갈 사람은 없기에 바울의 말에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지만 어디든 환경과 조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잘 전파될 수 있는 지역인지 환경과 조건을 계산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지역의 조건이나 환경과 무관하게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고린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로마 황제였던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시켰는데 그때 고린도로 이주한 유대인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18:4).

 

 

유대인이 많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유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에 부딪히는 난관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죽인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했을 때 그 말을 유대인이 순순히 듣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 고린도가 복음 전파에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갖춘 지역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인간적인 시각이고 계산일뿐입니다.

 

 

18:9-10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이 환상을 경험한 바울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오직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는 말씀만 의지한 채 고린도에 머물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인간의 말이나 지혜가 아니고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에는 자기 유익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성과를 올려서 그것으로 자기 이름으로 높이고자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복음을 위해서 라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추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전도, 즉 복음 전하는 것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 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교회를 다니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말을 잘해야 하지만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하면 그 때문에 아예 복음을 듣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계산과 노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로부터 예수를 믿겠다는 답을 들었을 때의 기쁨이 클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한 사람을 구원했다는 자기만족과 성취감, 그리고 보람 등등 여러 가지의 복합적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결국 자기 기쁨을 위한 복음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복음 전파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꾸면 해결되는 것입니까? 복음 전파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기 기쁨, 자기만족을 위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잘못됨을 찾아내어 수정함으로써 바르고 참된 행동을 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또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항상 자기 행동을 고치고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을 신자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잘못 됨을 지적하고 고치려고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바울의 말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고전 3:1-3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 말한 고린도 교회를 어린 아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에 있게 되는 모든 것이 교회의 실력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름 받게 되는 것이 교회의 실력이라면 그 교회에서는 어린 아이 같거나 육신의 속한 자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린아이 같고 육신에 속한 자의 모습만 나타낸다면 그것은 애당초 성도됨, 신앙의 모든 것은 우리의 실력과는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성도된 교회에 신앙의 실력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내놓을 만한 자기의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복음에서 나의 옳음이 중요하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궁극적 결과가 구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이 믿음의 전부라면 믿음으로 존재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자가 진리를 알았다면 진리의 길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의 옳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길로 감으로써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사람 역시 진리의 길로 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길로 부름 받아 그 길을 가는 것이며 그 때문에 자기 자유를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9: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진리의 길로 오게 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되는 심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5,26절에서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감사의 마음으로 먹으면 됩니다. 자기의 옳음과 자기 신앙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지 아닌지를 물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물음이 누구를 위해서인가를 생각해 보면 바울의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 13:5절을 보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께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된 지체를 향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자기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유익은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진리의 길로 가게 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유익입니다. 이 유익이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거룩할 수 없는 우리를 거룩한자 되게 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사랑으로 거룩한 성도,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 확인, 자기 증명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극적인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선하심인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처럼 신앙세계는 항상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산의 틀에서 확인되고 증거 되는 신앙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믿는 자인 여러분의 멋있게 보이게 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나를 부르셨고 도구로 사용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을 남의 유익을 구하는 길로 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총도 믿음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은총도 믿음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믿음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 믿음을 자랑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용서와 긍휼의 의미는 보지 못하고 끝까지 자신의 가치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지 못할 자의 특징입니다.

 

 

신자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지배 받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 사랑에 의해서 자기 가치가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 된 우리가 가는 진리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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