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11.24 16:05

(80강) 몸과 피에 대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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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설교>

기독교인의 믿음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하심과 인도하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기독교인의 삶은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강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든든히 서 있는 건물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과 염려가 없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기독교인은 천국을 믿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세상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늘 세상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기독교인의 현실을 보면 도무지 천국을 믿는 사람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현실이 일치되지 못하고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삶에 대해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만 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흔히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 약해서일까요? 그러면 믿음만 강하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안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이것이 믿음의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에서 믿음을 생각하는 결과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이 아닌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과 염려가 없는 심리적인 평안과 안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제멋대로 믿음을 자신에게 도움 되는 용도로 생각함으로써 자기 평안을 위한 믿음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자리이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이탈함으로써 인간을 돕는 믿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참된 믿음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리를 이탈한 존재임을 알게 하고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인간에 의한 믿음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구별은 어렵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래 자리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자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죽음이 우리의 본래 자리라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죄인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도 반응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한 일을 자기 공로로 돌리며 믿음의 증거물로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자리이탈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리에서 이탈한 채 말하는 예수, 십자가는 모두가 거짓일 뿐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이 27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몸과 피에 대한 죄가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6: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정기적으로 제사 드리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긴 것이 믿음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방 종교를 따르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믿음은 제사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인애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의 교회가 알고 있고 강조하는 믿음은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는 것을 믿음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고 주일을 지키고 교회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을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인간은 죄인이어서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목적이 인간의 구원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혼란을 야기 시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제사가 아니라 인애를 원하신다고 한 것은 제사가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도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답은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긍휼을 원하신다면 긍휼을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긍휼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긍휼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긍휼은 인간의 본래 자리인 죽음의 존재, 죄인의 자리에서만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한 채 살아가는 우리는 긍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고, 알지도 못하는 긍휼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죄인의 자리에 있게 하심으로 긍휼을 알게 하고 긍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정작 제사 규례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방법으로 제사라는 방법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을 찾는 인간의 종교성이 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제사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이방 나라가 신을 만들어 섬길 때도 나름대로 제사를 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제사 정도는 만들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제사 방법과 종류, 제사에 사용되는 도구와 제사하는 성막,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제물을 태우는 제단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이 마음대로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는 제사를 이렇게까지 세부적으로 만들어 지키게 하신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를 통하여 알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단에서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제물을 통해서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인간의 본질을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의 피를 대신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이스라엘을 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알지 못한 이스라엘은 제사에 실패했습니다. 열심히 제물을 바치고 제사만 드려주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사가 자기 자랑이 되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실패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던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또한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자기 자랑으로 삼았다면 우리는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소위 주일성수를 자랑으로 삼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행한 일이나 자기의 선함으로 보일 수 있는 여러 활동들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만들고 내가 행한 나의 사건으로 내세움으로서 자기 믿음의 우월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자리가 아닌 자기가 만든 자기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제아무리 십자가를 말한다 해도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가 자기 의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것인데 우리는 나를 나타내고 전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20,21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은 주의 몸과 피로 인한 새로운 몸의 관계로 함께 함을 뜻합니다. 즉 주의 만찬을 먹는 관계에서 나의 몸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자기 것을 주장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이유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는 말로 되는 것이면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라는 말은 사실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십자가를 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은 생각처럼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면서 떡을 데어주시며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주시며 내 피라고 하신 것은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성만찬을 제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한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살고 피를 먹고 마시는 제자들에게 계속 반복될 사건으로 나타날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만찬이 있는 자리는 내 몸은 사라지고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주의 몸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다면 그것은 주의 몸의 관계는 무시되고 자기 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바울이 그것을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행하는 주의 만찬, 즉 성만찬은 교회의 단순한 경건의식이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존재가 주의 긍휼히 여기심과 은혜를 확인하고 그 은혜를 함께 하는 형제의 관계에서 동일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 것은 교회가 죽의 죽으심, 즉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전하는 주의 몸으로 부름 받았음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이기에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가 비록 주께서 세우신 기념 의식이라는 이유로 성만찬을 행하기는 하지만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성만찬이 하나님의 긍휼이 있어 자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어긋난 채 살아가는 자신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엄중한 주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28,29절에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는 죄의 자리, 저주의 자리에 있던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먼저 자기를 살피지 않는다면 자신이 죄와 저주의 자리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본래 자리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주의 몸과 피는 그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 받고 죽으셨다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것이 타성에 젖은 성만찬입니다.

 

 

교회는 주의 몸과 피로 죄에서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몸의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사실을 나타내고 전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만찬을 가져오고 가난하여 가져오지 못한 자가 있더라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동일한 사랑과 은혜 아래 있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타성으로 박혀 있는 예수를 잘 믿으면 복 받는다인식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자기를 살핀다면 과연 그러한 생각이 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먼저 살핀다면 저주의 자리에 있는 자신이야 말로 복에 거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복에 거할 자격도 없는 내가 복을 추구하고 기대한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주의 몸과 피를 십자가에 죽으신 주의 뜻에 합당하게 먹고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모든 죄를 용서하신 은혜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타성이 되어 굳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살피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십자가는 매일 같이 회개를 촉구하는 외침이 되는 것이고 저주라고 하는 자신의 본래 자리에서 주의 은혜를 확인하고 느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일 주의 만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 성만찬이란 의식은 의미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가 행하는 성만찬 의식을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성만찬 의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이라는 의식을 행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믿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만찬 의식이 믿음의 증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긍휼과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세상의 부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의 고난을 동원하여 자기 백성을 인간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긍휼을 알게 하시고 긍휼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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