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12.08 15:34

(82강) 신령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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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1-3http://onlycross.net/videos/co1/co1-120103.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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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설교>

교회는 육적 관계가 아니라 영적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를 육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육적으로 보는 것과 영적으로 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육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행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육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시각에서 교회나 자신을 보게 되면 신자인 내가, 또는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히 교회 내에서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행했는가?’로 신앙 수준을 나누고 채점을 하게 됩니다. 즉 신앙이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육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보는 것은 육적 시각의 모든 것을 버리면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자 되게 하시고 교회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을 위한 어떤 업적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일을 전하라는 것이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전부인 교회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육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면 교회가 하는 일과 외적 규모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월이 됩니다. 세상을 위해 바람직하고 좋은 일을 하거나 교인 수의 증가나 교회의 분위기, 소위 민주적인 교회 운영 등등이 교회를 과시하는 조건이 되고 그것들이 교회를 우월한 시각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를 육적 시각으로 보는 결과이고 증거입니다. 그래서 육적 시각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자기 존재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육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육적인 시각에 있는 사람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이고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믿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다는 뜻이고 죄인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포기를 뜻합니다. 죄인이 자기 존재에 관심을 두고 무엇인가를 행한다 해도 여전히 죄인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죄인이라는 신분이 행함에 의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인 신자는 무엇으로도 우월의 자리에 있을 수 없고, 그러한 신자가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는 교회에 우월한 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월해지려고 하고 그로 인해서 교회에 여러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서 드러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믿음을 강조하면서 그 믿음을 인간의 행함으로 연결시켜 버린 육적 시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문제 또한 같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되었지만 십자가 신앙 위에서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기에 드러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12장에서 시작하여 14장까지 계속 되는 은사에 대한 문제 또한 그러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것은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한 것을 보편적이지 않은 특별하고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육적인 것과 구분되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함과 경험을 초월한 다른 것, 즉 성령으로 경험되고 드러나는 영적인 것을 신령한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은사로 인해 드러난 교회의 문제가 신령한 것을 알지 못한 오해로 인해 나타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은사가 우월이 되고 경쟁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령한 것이 주어지면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한 것이 신령한 것을 모르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인의 오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령한 것을 받으면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령한 것을 받음으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신령하다는 것을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령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일반 종교인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켜서 자기의 신령함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로 부각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행했다거나 할 수 있다는 것에는 중요성을 두지 않게 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무엇을 하거나 할 수 있다 해도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저주 받을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4절부터 보면 여러 은사에 대해 말합니다. 서로 자기에게 있는 은사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과연 무엇을 잊었을까요? 어떤 은사를 받았고 어떤 일을 한다 해도 한분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받으셨습니다. 지금은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있어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 될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 자체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모르십니까? 여러분이 모르고 계셨던 내용입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의미에 머물지 못하기에 자기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다’‘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성령을 보내셨다’‘하나님이 일하신다이 모든 내용들은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누구도 자기 행함으로 다른 사람과 차별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하나의 말이라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의미에 머문다면 교회는 무엇으로도 차별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알 것입니다.

 

 

성만찬으로 인한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가져온 만찬을 먼저 먹는 것보다 가져오지 못한 형제와 함께 먹는 것이 사랑을 행하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의 만찬의 정신, 그 의미는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는 것도 도와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지도 도와주지도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윤리적인 것을 교회 됨이나 복음의 정신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죄인의 존재가 예수의 죽으심으로 용서된 것임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만찬을 통해서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존재로 드러나 지며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한 개인을 위한 죽으심이 아니란 것입니다.

 

 

대개 보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나를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개인을 위한 십자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 전체, 신약의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만찬을 하면서 혼자 먼저 먹는다면 전체를 위한 예수님의 피를 개인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3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신령한 것이고 성령을 받은 신자가 신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예수를 저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것도 성령 받음을 너무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말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을 성령 받음의 증거로 자랑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이 은사였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한다는 것으로 자신이 마치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과시하고자 한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진 이유를 생각하기보다는 은사를 받은 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은사로 예수님을 자랑하고 높이지 않고 은사 받은 자신을 높이는 것으로 자신이 크고자 하는 이방인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3:29-30절에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자신이 쇠하여도 그것과 무관하게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례 요한에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자랑되고 높여지는 것이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자랑되고 높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받은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예수를 주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예수를 주라고 말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령 받지 못해도 예수를 주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에 소속된 종교인으로 예수 편을 들고 예수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얼마든지 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심이 예수가 아닌 자신이 높아지고 자랑되고 싶어 하는 것으로 향해 있다면 그것은 성령 무관한 기독교인의 말일 뿐입니다. 이처럼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처럼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라는 관계 때문에 예수님이 기쁨이 되고 예수님이 자랑되는 것으로 자신은 망해도 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분명 기존의 인간과는 다른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성령이 함께 하는 신령한 존재, 영적인 신자입니다.

 

 

2절에 보면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 말합니다.

 

 

우상에게로 끌려가는 이것이 성령 받기 전 모든 사람의 실상입니다. 자기의 높아짐과 자랑됨을 위해서, 즉 자기를 위해 도와줄 신을 찾는 수준에 있다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으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무슨 은사를 받았느냐와 무관하게 이미 신령한 것이 있는 신령한 자, 영적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이라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아가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게 되면 다른 것을 찾아서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한 기쁨의 한계를 이미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 있던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면 그것은 주되신 예수 앞에서 자신을 주로 인해 존재하는 약한 자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에 뜻을 두게 되는 것이 성령으로 사는 영적 존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령한 것에 대해 알게 되면 자신에게 어떤 은사가 있고 교회에서 무엇을 행하든 주만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된 것만 생각할 뿐이지 은사를 받고 교회에서 봉사한 자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만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행하든 그것으로 내가 아니라 주가 전해지기만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을 하든, 어떤 실력과 재능이 있든 그것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 앞에서는 티끌처럼 하찮은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 있는 무엇도 죄인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행한 일들에 이끌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항상 성령이 이끌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만 향하는 것이 영적 존재인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여러분도 십자가 앞에서는 초라하고 무능한 죄인으로 나올 뿐입니다. 목사로 설교한 것도 사소한 일입니다. 목사의 설교가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의 설교로 그리스도가 자랑되고 은혜가 전하여지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설교만 그렇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모든 것들이 주의 은혜가 전달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봉사의 여부에 따라 차별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양하게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주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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