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1.05 16:35

(86강) 지체의 동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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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26-27http://onlycross.net/videos/co1/co1-122627.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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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설교>

교회는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는 관계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 익숙한 말로 들려서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생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타인과 하나 되거나 한 몸의 관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 몸의 의미를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결속의 뜻이 담긴 연합, 또는 단합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일 뿐입니다,

 

 

설령 한 몸이 인간의 연합을 의미한다 해도 인간은 역시 타인과 연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연합한다 하더라도 그 수준은 목적과 뜻이 동일하거나 같은 학교 출신, 같은 고향 출신 등의 사회적 관계에 의한 친분을 발휘하는 정도입니다.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 관계가 없는 연합은 기대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6,27)는 말을 합니다.

 

 

교회의 결속력, 연합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한 지체가 고통을 받을 때 다른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반응이 어떤지를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면 심적으로 염려할 수 있고 아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자기 생활로 돌아가면 그 사람의 일은 잊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 받는 사람과 동일한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각자 몸이 다르고 마음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고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 한다는 것도 인간에게 경쟁과 시기심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근본적으로 자기에 대한 욕망이 없어야 하는 것이 타인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과 동일하게 받아들이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타인의 영광에 즐거워하기보다 시기로 반응한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말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관계이지만 이러한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힘써야 한다는 뜻일까요?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의 내용을 신자의 실천 목표로 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를 힘쓰면 그만큼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목표나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고 힘쓰면 그만큼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일 뿐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면 예수님처럼 해야 하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사랑하겠다면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할 수 없다면 결론은 아담 이후의 어떤 인간도 자신의 실천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말합니다.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이라는 것은 지체 하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 유익에 초점을 두고 어느 한 사람의 가치나 능력을 높인다면 그것은 한 몸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관계를 우리가 결단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사실보다 내 몸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한 몸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분이 함께 하는 지체에 대한 관심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든 한 몸이든 그것은 성경에 있는 내용일 뿐이고, 여러분에게는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관계가 전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한 몸의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도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신다면 오늘의 말씀에도 무관심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한 몸의 교회에도, 지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을 때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는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심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여러분께 지체에게 관심 두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체의 고통을 지체가 함께 받는 것은 우리의 관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체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한 지체의 고통을 모든 지체가 함께 받고, 한 지체의 영광을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관계를 이루시는 분이 성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이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은 없고 성령의 일하심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 성령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인간을 높이지 않고 성령의 일하심만 증거 하게 됩니다. 한 몸의 교회가 한 지체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높일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에 여러 지체가 있다고 할 때 각 지체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지체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면 됩니다. 바울의 말처럼 굳이 여러 지체가 한 몸이 되어야 하고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체의 고통을 함께 받지는 않는다 해도 얼마든지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면 되지 않을까요?

 

 

그 같은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은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주의적 믿음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당연히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믿음의 출처가 자신이기에 믿음의 효과와 결과는 다른 누구도 아닌 믿었던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믿고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그렇다면 천국도 과연 이러한 속성이 통용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를 믿는 믿음은 개인주의를 배격합니다. 소위 예수 잘 믿어서 복 받고 잘 살다가 천국가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발상을 용납하지 않으며, 그러한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믿음의 출처가 내가 아니고 나를 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함께 하는 지체에게 관심을 두고 모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이고, 이 성향을 버릴 수 없는 것 또한 우리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하나 된 한 몸의 관계에 있으며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 대해서 너를 쓸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를 우리가 경험하거나 실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관계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관심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굳이 다른 지체의 고통을 내가 함께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자리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우리에게 성령이 오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으로 인해서 여러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성령이 오심으로 은사를 받았습니다. 은사 받은 자신을 자랑할까요?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할까요?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할까요? 그 모든 것은 성령과 무관하고 오히려 마귀에게 장악된 인간적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분명한 자기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가치성, 쓸모없음에 대한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 인간의 개인주의적 속성에 대해 말씀드린 것이 그 이유입니다. 자나 깨나 개인주의적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과연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는지에 대해 파악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얼마든지 주를 위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의 칭찬과 공로가 나에게로 돌아올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임을 간파하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모든 것에 대해서 자신의 공로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신자 됨입니다.

 

 

그러면 한 몸 된 여러 지체가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으로 함께 할 것입니다. 인간의 무능과 무가치함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인식 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한 탄식과 고백 또한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며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한 지체의 고통이 다른 모든 지체에게 전달되어서 모든 이가 고통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고통이 성령 받음으로 있게 되는 것이라면, 성령 받은 모든 신자는 동일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면 누군가가 고통을 받을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안을 가지고 다가오는 경향이 허다합니다. 마치 욥의 고통에 다가왔던 세 친구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지체의 고통 밖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는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상에서의 삶을 전부로 여기고 그것을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세상에서 언제 확실하게 드러날지도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모든 가치와 소망을 두는 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고난이며 고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망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이 되고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통과 고난은 어느 한 지체에게만 아니라 성령 받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됩니다. 그래서 한 지체에게 이러한 고통이 있다는 것은 모든 지체에게 동일한 고통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을 지체의 동질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 성령 공동체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수고와 무관한 성령에 의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의 고통과 고난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육신의 환경이나 형편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삶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얻는 영광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몸의 지체가 얻는 영광은 다른 모든 지체에도 동일한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 인한 영광이고 신자는 이 영광을 추구하고 소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관계로 존재하는 교회됨의 증거임을 생각해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드러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갇힌 자가 곧 인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 틀이 부서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개인적 성향만 고스란히 드러낼 뿐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가에 집중 한다면 그 모든 말은 고린도 교회와 동일하게 개인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자라 하고 인생의 연륜이 깊고 신앙생활의 세월이 많다 할지라도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관심 두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나에게로만 향해 있을 뿐이지 그리스도께 관심 두고, 한 몸의 관계에 있는 지체에 관심을 두고 교회로 모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죄에 갇힌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신다면 신앙생활을 잘한다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언급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라 하고,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령이 일하시고, 성령을 받은 지체들이 함께 하는 한 몸이 교회인 것을 놓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성령을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죄인이라는 것에 공감을 하게 되고, 인간의 무가치함에 대해서도 공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존귀하다는 것에도 공감할 것이고,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은 자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것이 영광이라는 것에도 공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쓸모없는 인간에게 성령이 오셔서 일하신다는 것도 공감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이러한 공감으로 함께 한다면 신자는 서로에게서 성령의 일하심을 볼 것입니다. 누군가가 고통을 겪을 때 그것을 주께서 그를 사용하시기 위한 성령의 일하심으로 보게 되고 자신의 모든 삶 역시 성령의 일하심으로 보게 되는 그것이 지체의 각 부분으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에 함께 묶여 있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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