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1.19 15:23

(88강) 사랑이 없으면

조회 수 167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전 13:1-3http://onlycross.net/videos/co1/co1-13010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설교>

고전 13장은 기독교인들에게사랑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서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장에 들어가면 바울이 앞에서 어떤 내용을 말했는가를 잊어버립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은사로 인한 문제에 대해 말했습니다. 14장에서도 계속 은사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13장도 은사 문제와 연결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사랑이라는 다른 문제를 끄집어내고 다시 또 은사 문제로 돌아가는 식의 맥락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동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실천되어지는 부분에서는 분명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실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독교인이라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3장은 교회에서 일찌감치 감동용이거나 캠페인용으로 전락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닌 현실이 된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고 강조함으로써 마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바른 믿음에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에 빠진 믿음은 은사 문제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은사를 받은 것으로 자신이 믿음의 우월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었습니다. 13장은 이 착각을 허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1-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사는 아마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기를 사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천사의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설득할 수 있고 자신의 말을 듣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면 세상을 놀라게 할 능력자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자기 몸조차 내어준다면 세상에 없는 의인으로 인정되고 이름이 높임 받으며 존경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은사의 매력이고 은사를 받고 싶어 하는 이유라고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우월만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인간성은 교회라는 이름 아래 묻히지 않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자신의 우월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 안에서 종교를 이용하여 우월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더 돋보일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은사가 기회가 되어 고린도 교회에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를 받는 것이 받지 못한 것보다 믿음이 나은 것이고, 은사를 받았다 해도 어떤 은사를 받았는가에 따라 역시 믿음이 차별된다고 생각하는 교회에 바울은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은사가 아니라 사랑이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은사는 쓸데없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믿음의 증거가 능력이 아닌 사랑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능력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추구하고 그러한 은사를 받고 싶어 한다면 바울이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은사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재정의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교회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면 교회가 추구 할 것은 구제와 같은 사업이나 활동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은 고전 12: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은사가 가장 크고 다른 은사는 작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가장 위대한 은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가치만 추구합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 자랑 되는 것으로만 일관합니다. 이것이 죄의 세력 아래 있는 세상의 속성입니다. 사랑은 세상 속성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증거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세상과는 다른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더욱 큰 은사로 말하면서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은사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은사란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은사이건 성령 받은 본인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받은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사는 동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인간의 실력이 될 수 없고 능력으로 자랑될 수도 없으며 사랑 또한 성령으로 인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사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이 십자가로 증거 된 예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은사로 신자에게 주어졌다면 사랑의 은사를 받은 신자는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은사를 실천하고 행동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은사로 받았으면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은사 받았음을 보여줘야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으면 병을 고치는 것으로 믿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증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러한 은사를 행하는 자기 자랑과 과시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은사를 받고자 하는 주된 이유가 자신을 보여주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랑이 충만한 신자라는 칭송과 인정을 받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사랑을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4)라고 말합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고 보여줄 수 있을까요? 계속되는 사랑에 대한 내용을 보지 않아도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 조차도 우리는 넘어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자입니다가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을 받았을 때 그 사랑에 의해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면 세상은 살기 좋은 평화로운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교회가 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이것도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헛된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세상 변화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의 선악과 범죄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세상은 말 그대로 죄로 인해 엉망진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문제일까요? 아니면 인간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사명을 주셨는데 인간이 사명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서일까요? 변하지 않는 세상 현실에 대해 핑계 대기에는 아마 후자가 적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달라져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사랑에 무지한 자들이 별 생각이나 고민 없이 떠드는 헛된 말일 뿐입니다.

 

 

고전 2:12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영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영은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으면 은사 받은 나를 생각하고, 내가 받은 은사로 나의 믿음을 자랑하고자 하게 하는 것이 세상의 영입니다. 다른 말로 악한 영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악한 영을 받은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은사 받은 내가 아니라 은사를 주신 분을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임을 알게 하고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죽은 자일뿐이라는 것이 실제적 현실로 자리하면서 십자가로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사랑을 실천하자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저주가 당연한 죽음의 존재인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의 사랑이 저주의 존재인 자신의 모든 죄를 덮고 거룩한 백성이라는 신분으로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한 모든 내막을 알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주께서 하신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있어서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에 업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이 더욱 큰 은사이며 사랑이 제일 좋은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다면 어떤 은사를 받았건 받지 않았던 중요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신자는 지금 존재하는 자신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높이고 찬송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면 그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 받은 자의 방언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모른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신이 믿는 예수가 있을 뿐이고, 그 예수는 가짜입니다. 그런 그가 방언을 하든 천사의 말을 하든 그것은 사람의 만족을 채워주고 기쁘게 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것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방언이나 병 고침 같은 은사를 추구하는 이유는 믿음을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경험하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심심하고 무료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십자가나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는 감각적이지 않고 경험적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심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가 많이 힘쓰는 것이 교인들을 심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소리 나는 구리는 징을 말합니다. 이방 종교에는 징과 꽹과리 등을 동원하여 신에게 제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요란한 제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종교적 열성을 끌어내고 열광적인 분위기로 만드는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교회에서 예배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드럼과 여러 악기를 동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할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의 속성과 체계를 그대로 허용하신 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일하심이 우리에게 의심과 혼란과 흔들림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일하시고 관여하시는 세상 현실이 왜 그대로인가?’‘나는 왜 변하지 않는가?’라는 의문과 자책이 괴로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믿음을 받고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시고 이루실 일을 최선을 다해 힘써 행하고 이루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변하고 달라져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믿음의 성과가 드러나고 칭찬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속성과 체계를 그대로 허용하신 상태에서 일하시는 것은, 그러한 세상에서 사랑이 있는 자로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우리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눈에 들어오고, 내 성에 차고 만족이 되는 것만 기대하기 때문에 신앙이 아닌 나의 길을 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인은 신앙으로 살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높이고 복음을 사모한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 만족이 되는 신앙, 설교, 성경 해석 등을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이 없는 자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일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뭔가 이룰 것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칭찬 받는 번듯한 신앙인으로 드러나게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자체가 세상의 시각에서는 초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바라는 자로 살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의 이름, 나의 가치와 무관합니다. 이 사랑이 있는 신자라면 어떤 은사가 있든 그것으로 자기를 빛나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내 안에 살아계신 주께서 하신 것으로 여길 것이고, 자신은 사라지고 주만 높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있는 증거이고 열매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에 감사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Chapter 88

 

If So

 

Deck thyself now with majesty and excellency; and array thyself with glory and beauty.

Cast abroad the rage of thy wrath: and behold every one that is proud, and abase him.

Look on every one that is proud, and bring him low; and tread down the wicked in their place.

Hide them in the dust together; and bind their faces in secret.

Then will I also confess unto thee that thine own right hand can save thee. (Job 40:10-14 KJV)

 

(Sermon)

 

Many people say humans are scarce beings, but there is a pitfall in the idea, resulting in the reality that many are trapped there, away from the Bible with the misjudgment of human beings. The trap is that you can become a more mature human by filling in the missing parts and filling them with improvements. It is sanctification that people in this trap claim.

 

One of the crucial problems that the modern Christianity teaches is that there can be a positive change in personality depending on the effort of the person, but no matter how much one has changed it can’t be changed that one is still being under sin. If it is just being a hell under the curse, what is the meaning of sanctification?

 

It is the human reality that we can easily find if we pay attention to the Book of Romans. Yet, the real reality that the Bible says is ignored because we reject the reality of the Bible and try to make what the Bible says our favorite reality.

 

In Verse 10, it says, “Deck thyself now with majesty and excellency; and array thyself with glory and beauty.”

 

I’m not sure exactly how to adorn with majesty and excellency and clothe with glory and beauty, but let's say that we have mobilized all of the world to dress ourselves in dignity and honor, and in glory and honor. Could it be that we could empty the wrath we are in?

 

God says regarding this in Verse 11 to 13, “Unleash the fury of your wrath, look at every proud man and bring him low,look at every proud man and humble him, crush the wicked where they stand.Bury them all in the dust together; shroud their faces in the grave.”

 

There is nothing that will make us empty the wrath when it overflows. It is neither by personality nor character. The person’s character can not bring down the proud, nor can it tread on the wicked. What God is saying is that He asks Job, who thinks himself right, what he can do with his own righteousness.

 

In Verse 14, it says, “Then I myself will admit to you that your own right hand can save you.”

 

In other words, ‘if you can empty your wrath and bring a proud man down, I will admit that you are righteous’, implying that no matter how righteous Job is, he can’t even control his own fury, which is absolutely useless.

 

Why Job couldn’t understand the afflictions was that he thought he had sinned that much, meaning he thought he was righteous. He had something to say against God like ‘why do I have to deserve it since I have been doing my best serving God?’

 

If one is aware that one has sinned, one comes to be speechless of the punishment because one knows God is just. If one has something to say, it will be, ‘forgive me’ or ‘have mercy on me.’ It may be all that one could say.

 

In this sense, Job is the one who doesn’t know what sin is. All that he was doing before the afflictions was doing his best to revere God and eschew evil while told perfect and righteous by people. There would be no one who would see oneself a sinner in such life, causing Job to have something to say against God.

 

Likewise, there are many things we think are righteous in the life of faith such as helping others, devotion, charity, missionary and so forth. We believe doing such acts may please God. Even though it is a distorted view of God, we can’t recognize it, assuming we are fine while looking at ourselves.

 

What if we, then, received what Job received? The answer can be found in Job. That is all complaints and protest against God. Such thoughts, ‘I have lived for God’, ‘I have done my best being good in my conscience’, ‘I haven’t done anything wrong to others’ make us have something to say against God.

 

To such people like us, God is asking, ‘if so, can you empty your own wrath?’, and saying, ‘if you can, I will admit that your goodness can save yourself.’ What would you answer to God? I am sure no one would say anything to God.

 

Thus, our conclusion is to come to God as the one who God views we are. That is the one that can’t be saved despite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Only then, can we realize our saying, ‘why me?’ to God is our foolishness and ignorance from our unrighteousness.

 

When Job comes to realize this, he says in 42:3, “Who is he that hideth counsel without knowledge? therefore have I uttered that I understood not; things too wonderful for me, which I knew not.”

 

In 40:4, he said, “Behold, I am vile; what shall I answer thee? I will lay mine hand upon my mouth.”

 

It is the power of God that makes him perceive his lowliness and confess who he is. In other words, God makes us neither make up nor improve ourselves.

 

We hate to be a lowly being. That is why Jesus Christ came to a low place. Then what should we see from Him? Of course, it is our own lowliness. It is pointless to live well, doing good in the life of faith. Although it is enough for people to praise and acknowledge us, but all we are and do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 We should be able to check this every day as we live.

 

Do you all live well? It is good. Do you have anything to do without ignoring the work of the church? That is also good. However, it does not change our lowliness at all. It is not something that we can be proud of ourselves or makes us different from others either. This is why we can’t complain against God for what is given to us.

 

Do you still want to claim your goodness? Do you want God to recognize your goodness and right? If you have such a mind, ask yourself again. 'Can I empty my anger by my goodness and righteousness?' God says that He will recognize your goodness and righteousness as having the power of salvation.

 

 

If this is possible for you to become a reality, you can brag and boast for goodness and righteousness because it is worth it. Yet, if you know that it is not the power of salvation, forget all but the goodness and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Realize that Jesus Christ, who said, “it is finished”, is the only power of salvation and man is a failure. Try to look at the world at the seat of loser. We will find all things that can not be understood, frustrated, and unjust are not of God's unrighteousness, but of our evil thoughts. God is the One who makes us realize how ignorant we are.

 

It is not faith to acknowledge the existence of God. It is not faith either if one acknowledges God's existence but doesn’t acknowledge God’s involvement and intervention of all things in the world. By faith, there is nothing for one to say done unjustly or incomprehensibly because one knows all is of the work of God.

 

 

It does not mean that any thing is blindly accepted as God's work. If God is there and the work and involvement of God is the work of the world, then we must not forget that we, as believers, are in the relationship with God as the people of God because it is the true reality. Living such reality is faith!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19555
2019.04.13 491 고린도전서 (100강) 보이시고 신윤식 1372
2019.04.06 490 고린도전서 (99강) 성경대로 신윤식 1389
2019.03.30 489 고린도전서 (98강) 헛된 믿음 신윤식 1459
2019.03.23 488 고린도전서 (97강) 교회의 질서 신윤식 1382
2019.03.16 487 고린도전서 (96강) 화평의 하나님 신윤식 1206
2019.03.09 486 고린도전서 (95강) 예언의 의미 신윤식 1283
2019.03.02 485 고린도전서 (94강) 통역의 의미 신윤식 1297
2019.02.23 484 고린도전서 (93강) 풍성하기를 구하라 신윤식 1269
2019.02.16 483 고린도전서 (92강) 방언과 예언 신윤식 1740
2019.02.09 482 고린도전서 (91강) 제일은 사랑 신윤식 1382
2019.02.02 481 고린도전서 (90강) 온전과 부분 신윤식 1236
2019.01.26 480 고린도전서 (89강) 사랑은 신윤식 1331
2019.01.19 » 고린도전서 (88강) 사랑이 없으면 신윤식 1670
2019.01.12 478 고린도전서 (87강) 다 신윤식 1229
2019.01.05 477 고린도전서 (86강) 지체의 동질성 신윤식 1159
2018.12.29 476 고린도전서 (85강) 몸은 하나라 신윤식 1271
2018.12.22 475 고린도전서 (84강) 몸과 지체 신윤식 1221
2018.12.15 474 고린도전서 (83강) 여러 가지 신윤식 1179
2018.12.08 473 고린도전서 (82강) 신령한 것 신윤식 1409
2018.12.01 472 고린도전서 (81강) 서로 기다리라 4 신윤식 134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