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2.02 14:46

(90강) 온전과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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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8-10http://onlycross.net/videos/co1/co1-130810.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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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설교>

기독교인이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떤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앙세계는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이 복주시고 기쁨과 평강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구절을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을 선택하여 속에 담아둔 결과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신앙의 여부와 무관하게 고난과 고통을 겪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후 설교에서 다루고 있는 욥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욥 이야기에서도 마음에 드는 내용만 선택하여 담아두려 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구절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담아 두었다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지금은 미약해도 하나님이 창대하게 해주신다는 이야기로 만들어 냅니다. 욥의 이야기에서 욥의 고난은 관심 밖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런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에 들지 않거나 원하는 내용이 아닌 것은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자기 멋대로 선택하여 담아둔 내용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작금의 기독교 현실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온전한 것을 버리고 부분적인 것을 붙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인 것을 하나님의 축복인 것으로 오인하여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온전한 것을 모르기에 부분적인 것에 매이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에 기대와 소망을 두는 어리석음의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에 대한 분별이 없다면 사라질 것에 매몰되어 함께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9,10)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라는 말에서 답해 줍니다.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사랑이 온전한 것이고 예언, 방언, 지식을 폐하여질 부분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중에 어느 것에 붙들려 있었을까요? 은사로 인해서 분쟁과 경쟁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들은 부분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것보다는 폐하여질 부분적인 것에 자신의 가치를 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온전한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로만 유지 되는 것입니다.

 

 

사랑, 예언, 방언, 지식 중에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은 무엇일까요? 평소에 우리 마음이 끌리는 것은 개인적 유익과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랑보다는 예언, 방언, 지식에 더 마음이 끌린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을 속에 담아 두고 사는 것보다는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며 지식을 보여주는 것이 자기 신앙의 능력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과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과 도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것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모든 문제를 자신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개인의 가치 향상에 도움 되는 것은 모두 선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에 매입니다. 부분적인 것이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할 수 있는 자기 세계를 이뤄줄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 전부에 관심두지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연관되고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성경도 이러한 습성으로 대하기 때문에 성경 전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치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만 선별적으로 골라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전부를 보려고 하지 않고 부분적인 것으로 구축한 신앙세계가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온전한 것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전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분적인 것은 온전한 것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분을 통과하여 온전한 것을 알고 온전한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 성경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언을 한다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이고 방언을 한다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이나 방언이 구원의 능력이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인 것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자랑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없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무엇입니까?’세상을 둘러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덕에 편하게 먹고 살 것이고 어떤 사람은 눈물겨운 노력과 힘을 다 쏟아 부어야 근근이 유지하는 삶을 살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처럼 다양한 삶이 어우러져 있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의 현장도 인간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 앞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죽음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고 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죽어 있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숨을 쉬면서 날마다 먹고 마시고 일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자신을 죽어 있는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억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실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어 있다는 것은 죽음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면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곧 사망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웃고 있어도 죽음의 존재로 웃는 것이고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했다 해도 결국 죽음의 존재로서의 성공이기 때문에 성공이라고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우리가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살아온 내가 원하는 나의 세상이라는 것은 한낱 지푸라기와 같은 허망한 것일 뿐임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계산하고 판단합니다. 모든 것의 가치도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높은 위치로 올라가도록 도움을 줄만한 것들만 추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현재 상태나 마지막에 대한 안목이 없이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을 구분하며 지금까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왔던 부분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 금이 가고 무너지게 된다면 그것이 곧 온전한 것으로 인한 새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과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러한 문제 또한 여러분의 관심밖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전과 부분에 대한 것을 몰라도 예수만 믿으면 되고,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닐까요?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는 폐하여질 부분적인 것을 붙들고 있으면서 정작 온전한 것에서는 멀어져 있었습니다. 부분적인 것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마치 온전한 믿음의 길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온전한 것은 놓쳐 버린 채 항상 부분적인 것을 가지고 자기 믿음을 판단하고 비교하고 시기하는 우리의 현실이 보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인 것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 방언, 지식 등 은사를 받는다 해도 그것으로 온전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 하여 사랑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방언과 그 외의 모든 은사를 받아도 역시 사랑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온전한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것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시기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은사에 끌리는 것은 은사가 자신의 신앙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사도 폐지될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는 것이고, 폐지될 부분적인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가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업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제일 가치 있는 것은 온전한 것, 즉 사랑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사랑으로 확정되어 있다면 사랑 외에 다른 모든 부분적인 것에는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온전한 것을 알고 온전함에 속한 신자는 자신에게 어떤 행함이 있다 해도 거기에 아무 가치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5:48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온전해질 수 있을까요? 믿음의 행위로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실천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정도로 선을 행하면, 다시 말해서 그 모든 부분적인 것들을 끌어 모은다면 온전해질 수 있을까요? 그렇다 해도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하나의 말씀 앞에서도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부분적인 것을 마치 온전한 것인 것처럼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이 중대한 오류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폐하여질 부분적인 것들을 붙들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것은 애당초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을 세상에 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처음부터 세상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것이 세상에 왔을까요? 아직 오지 않았을까요? 온전한 것은 사랑을 말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기에 온전한 것은 세상에 와서 우리에게 함께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신자는 온전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부분적인 것은 폐지 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10: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온전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이미 영원히 온전함을 입은 신자에게 왜 폐하여질 부분적인 것에 해당되는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어떤 부분적인 것에 대해서도 가치를 두지 않고 부분적인 것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것으로 온전한 것의 가치를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자 됨을 흔들고 훼방하기 위해 사탄은 부분적인 것이 나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한다는 유혹으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부분적인 것에 힘을 써야 한다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은 그것을 부분적인 것으로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유혹을 따라 부분적인 것으로 자신을 가치 있는 자가 되게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함을 입은 신자에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아보면 자랑하고 시기하고 다투었던 것들이 모두 부분적인 것이었음을 알 것입니다. 온전한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나아왔으면서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분적인 것인가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나로부터 행해지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치 있는 신앙으로 높이는 것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십자가를 말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서부터 깊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들 위에 세워진 십자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것을 모른다면 부분적인 인간의 행함과 열심 위에 세워진 거짓 십자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된 신자는 죽음의 존재인 자신에게 온전이라는 기적이 이루어지게 된 내막에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길로 가는 것을 자신에게 삶이 허락되는 이유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려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려 가는 신자라면 부분적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부분적인 것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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