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2.09 15:43

(91강) 제일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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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11-13http://onlycross.net/videos/co1/co1-131113.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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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설교>

인간은 자기 행동을 죄가 되는 것과 죄가 되지 않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최선을 다해 죄가 되는 것을 피한다면 죄를 범하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자신에게 죄가 되는 것을 피하고 행하지 않을 의지와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자기 착각이 존재합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렇게 착각하는 것은 죄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딤전 6:9-10절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3:5-6절에서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탐심은 현재의 자신보다 더 가치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할 때 과연 누가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13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랑의 열매가 나의 성공으로 맺어지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에 그동안 성경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던 지식으로는 동조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도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이 있음으로 해서 또 다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은 육신의 문제에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면 관심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에 의해서 우리의 실패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에 대해 갈 3:22절에서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죄 아래 갇힌 것이 모든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행동을 죄가 되는 것과 죄가 되지 않는 것으로 구분하고 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구분하고 죄를 피하고 이기겠다고 작정하는 그것이 자신을 영원한 죽음에 갇히게 하는 현실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람은 자기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서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을 꿈꾸기도 하고 예쁜 아내, 멋있는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꾸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인은 믿음 좋은 자신에 대한 꿈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꿈을 꾸고 설령 그 꿈이 실제로 이뤄진다 해도 인간이 처한 진짜 현실은 죄 아래 갇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만 생각하면서 죄라는 진짜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받으면 신앙인으로서 우월한 자리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은사 받는 것이 받지 못한 것보다 더 믿음이 있는 증거라고 여겼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무엇을 행하는 것으로 믿음의 좋고 나쁨을 구분합니다. 선교를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 구제를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 기도를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 등등 수많은 행함을 끌어 당겨서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어떤 행함이 있든 없든 모든 인간이 죄 아래 갇혔다는 현실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증거입니다.

 

 

9장에 보면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맹인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9:3)

 

 

제자들은 사람이 정상인으로 태어난 것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보다 나은 것으로 봤습니다. 맹인에 비해 정상인으로 사는 것이 더 낫고 행복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날 때부터 맹인이라는 처지와 비교하면 정상인인 것이 더 낫고 행복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정상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맹인보다 더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 갇혔다는 증거입니다.

 

 

정상인이든 맹인이든 몸의 상태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할 동안만 유지되는 한시적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모두 부분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처럼 부분적인 것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부분적인 것으로 우월과 열등을 논하는 오류에 갇히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를 받았든 은사가 믿음의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퍼즐 조각의 하나처럼 부분일 뿐입니다. 퍼즐 조각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모양과 다른 그림의 조각이 모여서 전체를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퍼즐 조각에 불과한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며 가치를 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9,10절에 보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진다면 적어도 은사는 은사 받은 자를 온전한 자로 만들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예언하는 은사를 받아서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 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갇힌 인간은 온전한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게 되고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바울은 제우스로, 바나바는 헤르메스라는 신적 존재로 오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을 향해서 자신들도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소리칩니다.(14:15)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사도의 말 한마디에 일어나 걷게 되는 것은 분명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적을 현실에서 실제로 목격하고 경험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성령이 역사하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전체로 자리하면서 자랑이 되고 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으로 자기 신앙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게 하려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사건 자체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적을 목격 했든 실제로 기적에 의해서 걷게 된 당사자이든 기적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병 고침 받는 기적도 온전한 것 앞에서는 폐하여질 부분적일 뿐인 것입니다.

 

 

14:8-10절에 보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걷지 못한 사람에게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봤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바울의 기적을 경험했기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걷지 못할 때에도 걷게 된 이후에도 그 사람을 천국의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구원 받을만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를 합니다. 걷게 되기 전과 걷게 된 후의 믿음이 다를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걷게 되는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믿음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우리 멋대로 상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주의 은혜만 바라보게 합니다. 걷기 전에도 주의 은혜 아래 있었고 걷게 된 후에도 주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걸을 수 없는 자를 걷게 하신 것으로 인해서 주의 은혜가 살게 한다는 것을 더 강력하게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가치 있는 신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해서 가치 있는 신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든 선한 일이든 그것이 어둠에 갇힌 우리를 빛나는 존재로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빛 기운데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외부에서 빛이 오고 우리를 그 빛 아래 있게 하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빛이 온전한 것일 뿐입니다.

 

 

믿음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믿음은 믿는 자를 유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익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유익을 뜻합니다. 즉 믿음이 개인적 육신의 문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과연 온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모두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항상 있는 다는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그대로 우리에게 머문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다 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에 의한 믿음과 소망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믿음이 좋은 나’‘소망이 있는 나이렇게 자기에게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고 소망이 없다고 생각되면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말하되 항상 자기 자신으로 결론 내리고 싶어 하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합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림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뜻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늘 그런 방향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보다 장성한 사람의 신앙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신앙인이 되자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 본성이며 이 본성이 성경을 보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어린 아이의 일은 구분해 내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의 일은 부분적인 것으로 자신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온전한 것이 오게 되면 온전한 것에 의해서 부분적이던 것들이 의미 없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온전한 것이 존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온전한 것의 존귀함을 알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부분적인 것을 믿음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장성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성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실천으로 장성한 사람 되는 것에 마음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믿음의 현실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본다 해도 거울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내 스스로 나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할 뿐입니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어느 부분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아 보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나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편할까요? 거울은 우리의 실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해주지도 않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보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곧 천국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나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 대해 온전히 아는 것이 무엇일까요? 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고 있다면 죄인의 괴수로 선언될 수밖에 없는 죄만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결론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믿음도 소망도 그리스도께로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곧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은 내가 부인되는 세계입니다. 믿음 좋은 내가 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부인되고 십자가의 피의 은혜만 자랑하고 높이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는 믿음이고 소망이기 때문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없고 예수님의 사랑만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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