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3.09 15:37

(95강) 예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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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4:20-25http://onlycross.net/videos/co1/co1-142025.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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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설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누구보다 더 많이 방언을 말할 수 있었지만 교회에서는 방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방언과 예언의 가치를 비교하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말하는 자의 실력이나 능력이 아닌 듣는 자의 유익입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는 말로 시작하여 방언이 아닌 예언에 중점을 두는 모든 말들이 바울의 관심이 듣는 자의 유익으로 향해 있음을 말해줍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것도 통역으로 방언의 가치를 향상시키라는 뜻이 아니라 듣는 자의 유익에 모든 관심을 둔 바울의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관심은 은사 받은 자신에게로만 집중되었습니다. 은사를 성령이 주는 특별한 능력으로 간주하고 은사 받은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성이 은사, 특별히 방언과 신유와 같은 경험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고전 10:23,24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상 제물이든 은사 문제이든 모든 관심을 다른 사람, 즉 지체의 유익에 둡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교회는 자기 신앙을 증명하고 나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현장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된다고 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 수준이 높고 그것을 자랑한다 해서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몸의 관계로 묶어 놓으신 것은 나 아닌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것에 뜻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나를 보여주는 것도 내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 신앙과 전혀 다릅니다. 유대교 신앙의 중점은 하나님을 믿는 본인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실수와 허물을 드러내어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합니다. 방언 하지 못하는 것을 성령 받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여 방언 하는 자신이 성령 받았음을 증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의 신앙은 유대교 신앙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금의 한국교회 신앙 역시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체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부르셨다는 것은 무시하고 타인과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좀 더 우월한 수준의 신앙인으로 드러나고자 하는 것에서 개인 신앙에만 집중하는 유대교 신앙과 도무지 다르지 않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입니다. 유대교 신앙의 특성이 교회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의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말도 신자가 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아이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으로 시작하여 자신으로 끝나는 것이 어린 아이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장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지혜를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라고 말합니다(고전 2:6). 즉 지혜는 세상에는 없는 것이며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다만 성령에 의해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성령에 의해 지혜를 알게 된 사람입니다.

 

 

지혜에 대해 바울은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고 말합니다.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고전 1:24).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이 택한 자를 죄에서 건지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여기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창세전에 작정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과 열심으로 신을 섬기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으로만 알게 됩니다.

 

 

교회는 성령 받은 신자들이 함께 하는 성령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교회에 어떤 자로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요? 소위 신앙을 자기 실력으로 간주하고 자기 우월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신자 됨일까요? 하지만 그것이 곧 지혜에는 아이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전 2:8절을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만약 세상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가 있었다면 영광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세상에는 지혜가 없었음을 증거 하는 것이고, 따라서 누구도 자기 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고 구원을 얻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자신의 자랑이 되는 모든 것이 부인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이 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남보다 나은 것으로 여기는 신앙생활 등등을 포함하여 성령으로 받은 은사까지 모든 것에 대해 부인하는 신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마치 자신의 믿음에 의한 능력과 실력인 것처럼 간주하면서 자신의 신앙적 우월을 보여주고자 하는 도구로 이용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에 치우친 어린 아이인 것입니다.

 

 

흔히 어린 아이를 아직 성숙하지 못한 존재로 보고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을 지혜에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는 말은악에는 성숙하지 못한 존재가 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결과가 되기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출처가 하나님인 반면에 악의 출처는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시작하여 인간으로 끝나는 것이 악입니다. 따라서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는 것은 자신을 악의 존재로 규정하고 십자가 앞에 나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에 대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속성은 타인의 믿음을 판단하고 지적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마치 자신은 악에서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랑과 함께 자기 변명과 자기 방어에 능숙한 죄의 속성을 교회라는 관계에서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으며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세우신 법적 규례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율법에는 방언에 대한 규례가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이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방언에 대한 율법이 따로 있다는 것일까요?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저주의 존재일 뿐임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백성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 됨을 위 한 하나님의 모든 일이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말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절은 사 28:11-12절의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라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이방인에 비해 특별히 나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은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이 아니면 심판을 받아야 할 저주의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마치 이방인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처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라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하여 이스라엘 전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 방언으로 가득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사 28장의 내용입니다.

 

 

앗수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이스라엘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듣고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이것이 율법의 의미와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앗수르 방언을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방언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말함으로써 믿는 자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듣게 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선지자의 말을 방언처럼 여겼던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앗수르 침략을 이러한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여 드러낸다면 그것이 예언이 되는 것이고 항상 듣고 싶은 말에만 반응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에 대한 표적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간의 실상에 눈을 뜨게 되고, 저주 받을 자라는 인간 본질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유익입니다.

 

 

이러한 유익은 지혜를 깨달은 자의 말, 즉 예언으로 인해서 있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됨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의 시각에서는 정신 나간 자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24,25절에서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 말합니다.

 

 

예언의 말은 우리의 숨은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부끄러운 자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경배하게 합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해서 자신이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예언은 모든 지체를 하나로 모읍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만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것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긍휼을 구하는 불쌍한 자로 함께 할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4:11,12절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로 부름 받든 선지자로 부름 받든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어떤 것도 우리를 우월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은사든 직분이든 오직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서로 지체의 관계에 있게 하시고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게 하시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하나님의 일을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이 예언입니다. 때문에 성령은 우리를 예언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확정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하는 완성된 나라만 소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의 피로 이루어진 그 나라만 증거 하는 다 예언을 하는 교회로만 드러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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