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1강) 혈과 육

by 신윤식 posted Jul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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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50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50.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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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설교>

설교의 기본은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가운데 설교를 해야 합니다. 만약 기본이 상실된 설교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세상에 차고 넘치는 의미 없고 허탄한 말의 하나일 뿐입니다. 설령 감동 받고 은혜 받은 사람이 있다 해도 성령과는 무관한 인간의 흔한 감정의 반응일 뿐입니다. 감정적 반응을 은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설교의 기본이 되어야 할 십자가가 현대의 설교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대신 청중에게 감동을 주고 자기 설교에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인위적 수단만 난무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설교의 기본과 목적,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 한 채 설교 하는 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기면서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설교로 자신의 가치와 믿음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보이려는 설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 역시 설교를 통해 설교자를 보게 되는 것에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그럴 위험이 농후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십자가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완악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 존재입니다.

 

 

십자가가 기본으로 자리한 설교라면 거기에는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만 담길 뿐이지 설교자의 인품이나 믿음이 담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도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자기 설교를 통해 계속 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설교가 옳다고 해서 설교자가 옳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로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믿음과 삶이 설교의 기본인 십자가의 정신에 이끌려 가는 것으로 하나님이 성령으로 일하고 계심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존재 이유고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교회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이 대해 설교한다면 그에게는 설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을 향한 저주의 외침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설교를 바울에게서 듣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의 기본은 두말할 것 없이 십자가입니다. 설교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말합니다. 설교 앞에서는 바울 자신 또한 죄인의 괴수로 고백합니다. 사람들이 바울 자신을 바라보고 높이는 것을 경계하고 책망하며 주께로만 모든 시선을 두게 합니다. 인간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주만 의지하는 것, 바울에게는 오직 이 소원만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바울의 소원을 따라 주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를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고 거기에서 피 흘리고 계신 주를 보게 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했던 것이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한 어리석고 무지한 말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관계에 붙들어 놓고자 하는 은혜임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이 더 크게 우리 안에 확정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고 말합니다.

 

 

한 절의 내용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는 자,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로 규정됩니다. 왜냐하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는 썩는 것인데 우리가 혈과 육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을 포기하거나 다스리지 못하고 아예 혈과 육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 현실이기 때문에 바울의 말에 따른다면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혈과 육을 썩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썩지 아니하는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연히 부활도 혈과 육의 연장선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몸은 혈과 육의 몸과는 전혀 다릅니다. 만약 부활이 혈과 육, 즉 몸의 부활이라면 부활은 죽지 않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인간이 선악과 먹기 전에 죽음이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혈과 육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아닌 것은 결국 썩어지고 사라질 것일 뿐입니다. 생명이 아닌 것이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은 부활을 소망한다고 하는 우리가 여전히 혈과 육의 싸움에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고 말했습니다.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면 썩을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욕된 것에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것에 모든 가치를 두는 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생명의 세계는 썩고 욕되고 약한 것, 즉 혈과 육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부활을 말하고 생명을 말하되 삶으로는 그 모든 것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혈과 육이 자랑이 되는 세상에서 그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풍토에 함께 어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십자가를 외친다면 그것은 교회로서는 스스로 위기를 끌어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도, 심지어 교회를 찾는 이들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외친다는 것은 곧 싸움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위기라고 말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교회가 사회에게 신뢰를 주기보다 비난을 받고, 젊은이들이 교회에 실망을 하고 신앙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교인수가 성장하지 못하고 감소하는 것 등을 이유로 위기로 진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과 기준으로 교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혈과 육에 매인 것이고 오히려 그것이 교회의 위기를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모릅니다.

 

 

교회의 위기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에 관심 두지 않고 설교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는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혈과 육으로 존재하는 사람 자체가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기 속에서 십자가가 외쳐지고 복음을 믿는 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삼하 24:1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한 것은 혈과 육의 문제입니다. 혈과 육은 싸움의 원천입니다. 혈과 육으로 사는 것이 곧 내 것을 확보하고 더 많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기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를 조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으로 칠만 명이 죽게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마음에 자책을 하고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였다며 회개를 했습니다(삼하 24: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만 명이라는 사람을 죽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혈과 육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모순된 내용이 한둘이 아닙니다. 일단 인구조사를 책임을 다윗에게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시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다윗이 잘못했다 해도 백성 칠만 명을 죽이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구조사 문제에서 백성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일하신 것일까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에게 속한 백성이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가와 무관하게 다윗에게 속했다는 이유 하나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47,48절에 보면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흙에 속한 자입니다. 흙에 속했다는 것은 곧 저주에 속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행위가 있기 전에 이미 흙에 속한 자로 세상에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또한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안에서 다윗에게 속한 백성이었던 것이고 다윗에게 속했다는 것이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치신 것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삼하 24:17절에 보면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백성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죽는 것을 보고 백성이 아니라 자신이 범죄 하였으니 자신을 치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 한 사람의 죄를 묻고 치기 위해 인구조사를 하도록 다윗을 격동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호소 후에 갓이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삼하 24:18). 그리고 다윗이 아라우나를 찾아가서 타작마당을 사서 제단을 쌓겠다고 하자 아라우나는 모든 것을 그냥 바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신 것입니다(삼하 24:25).

 

 

여기에서 우리가 중점 둘 것은 하나입니다. 인구조사와 이스라엘의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존재 왔음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의 제사입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다윗에 의해 존재하는 다윗에게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로 존재하는 하나님께 속한 나라인 것이 증거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체험하게 하신 것이 인구조사에 담긴 내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혈과 육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고했던 모든 것이 담긴 흔적이고 증거물입니다. 우리는 그 증거물을 내어 놓고 서로 누가 잘살았고 못 살았는가를 비교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결국 혈과 육에서내가 수고하며 살았다는 자기 공로와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속했기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6:12절을 보면 바울이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한다고 하는데, 악한 영은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즉 바울이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싸움의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자신을 나타내고 보이고자 하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용서였음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기에 참여하게 된 싸움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면서 초점을 나의 부활에 두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내가 더 존귀하고 가치 있는 영광의 존재가 되는 것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자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했을 때 무엇보다 중점 두어야 하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됨을 증거 할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인 것입니다. 악한 영은 부활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혈과 육의 싸움에 매진하고 승리를 통해서 혈과 육의 가치를 더욱 향상 시키는 것을 인생의 성공으로 규정하지만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이 한마디의 말로 혈과 육은 세상 기준에서 제아무리 가치 있는 존귀함을 입고 있다 해도 십자가의 시각에서는 허망할 뿐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기본이 십자가로 되어 있으면 항상 듣는 자와 부딪히는 것입니다. 혈과 육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혈과 육을 부정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으로는 되지 않는 용서의 세계로 끌어가서 세상에 없는 생명의 존귀함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시고 거룩한 자로 여기십니다. 그리도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사망이 없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혈과 육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행실과도 무관하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을 보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만 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내가 아닌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럴 때 용서의 은혜로 사는 참된 현실을 만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