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7.13 15:29

(112강) 마지막 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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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51-5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515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설교>

세상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합니다. 현재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지나간 시간은 과거, 나중에 오는 시간은 미래로 나누는 것인데, 성경을 이러한 시간관으로 보게 되면 성경의 역사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사건으로 구분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미래의 사건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기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을 요한계시록을 믿는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은 과거와 미래로만 존재할 뿐, 현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어쨌든 성경이 현재의 세상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 자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건은 교훈을 주고 미래의 사건은 소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은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해당될까요? 내용만 보면 누구나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 된다는 것이나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는 것이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나팔에 홀연히 변화하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의 사건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현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전 4:16절의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는 말에서도 나팔 소리는 예수님이 다시 강림하실 때에 있을 현상으로 언급되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나팔은 천사가 부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마지막 나팔 소리를 재림과 연관된 미래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일까요? 인간의 시간관에 의하면 과거가 먼저입니다. 과거를 거쳐 현재가 있고, 현재 다음에 미래가 있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나팔 소리도 현재를 지나서 언제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미래의 때에 이루어질 일로 미뤄 놓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창세전의 예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내용으로 일관성 있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일하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은 예정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과거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지나간 역사로 묻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고, 현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에 붙들려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다 지나간 과거의 일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 먹은 일이 현재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자신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사건을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순종하자는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악과 사건은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되는 현재의 문제였습니다. 어느 시대인지와 무관하게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계속 자기를 위해 선악과를 취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존의 시간관이 있습니다. 시계를 보면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고 해가 뜨고 지며 날짜가 바뀌는 일상 속에서도 역시 시간이 흐르고 지나간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시간에 대한 내용들이 쉽게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길게 말씀드리는 것은 마지막 나팔 소리나 변화라는 내용들을 시간적으로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1,52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살전 4:16,17절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마지막 나팔은 주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 있을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가 아니라 우리가 미래로 생각하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있을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문은 다만 마지막 날에 나팔 소리와 함께 재림하실 예수님을 소망하며 살자는 지극히 통속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나팔 소리가 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가는 것이 그 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라면, 굳이 설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가 되었음을 알라는 것일까요? 하지만 나팔 소리로 재림의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일까요?

 

 

나팔 소리를 듣고 정신 차리고 재림을 대비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 구상한 수단이고 방법일 뿐이지 재림에 대한 인간의 준비, 대비로 마지막 때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생활을 고치는 것으로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팔이나 변화되는 것 등에 대한 내용을 미래에 재림이 있을 때 있게 되는 세상의 상황으로 상상하는 것은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건물만 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먼저 나팔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 출 19:13절을 보겠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 나오게 하기 위해 나팔을 사용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즉 소집을 명령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나팔 소리로 하나님이 계시는 산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사정은 어떻겠습니까? 섬기는 신을 만났으니 기쁨과 감격과 감사로 춤을 추며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겠노라는 각오와 결단의 시간을 가진 후에 힘이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갔을까요?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 산으로 모인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고, 여호와를 보면 죽는다는 경고를 받아 하나님이 세우신 경계를 넘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말로만 들으면서 섬겨 왔던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실제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체험한 분위기는 두려움과 무서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오게 되자 하나님을 섬겨왔다는 명분도 사라지고 다만 심판 받을 자로 서게 될 뿐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백성을 나팔로 부르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체험하게 되는 심판의 현장에서 인간의 의와 공로와 자랑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것이 인간을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로 돌려놓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죽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로 존재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무서움은 인간의 것으로는 무엇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세운 사람이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을 세워서 속죄제를 드리게 함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에 예수님보다 더 존귀한 분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팔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도 있을까요 없을까요? 실제 나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상상한다면 나팔과 지금의 우리는 무관한 것이 됩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도 당연히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체험할 문제가 되는 것이고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에는 이런 현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소개하고 그치는 것이 전부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나팔 소리가 들리면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시내산으로 가면 되었습니다. ‘나는 가기 싫다하고 가지 않는다면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 조상 대대로 상상해 온 하나님을 섬기며 여전히 복 받을 것만 기대하는 수준에 머물 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나팔 소리는 무엇이고, 나팔 소리가 들리면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나팔 소리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할 산으로 이끌었다면 나팔 소리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6:8-11절을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로 끌어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심판을 보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인간은 스스로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 자기 구원으로만 가득합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욕망으로 채워진 믿음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구원에 대한 욕망으로 채워진 믿음을 믿음으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고후 4:10-11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약해지신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믿음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의 자리에 있게 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사도도 자신의 행함이나 선함을 근거로 해서 믿음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세상 안에서 어떤 힘도 필요하지 않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증거 되는 십자가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자발적으로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의 능력에 붙들려 끌러가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시대에 나팔 소리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세상에는 감추어졌고 알 수 없는 비밀이기 때문에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이라면 다른 나팔 소리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나팔 소리가 우리를 십자가 현장으로 부르는 것이고, 그 현장에서 우리 모두가 죽은 자임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자신이 무덤에 있는 죽은 자임을 알게 되었다면 그가 바로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은 자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이 계획안에서 이미 썩지 아니 할 것을 입은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썩을 몸인데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겠지라고 막연하게 나중 일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는 현재이고 미래는 미래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일 뿐입니다. 현재는 현재의 인생에 충실하고, 미래를 소망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은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죽음 문제와 상관없이 그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모든 일이 되어진 완성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눈에 보이는 현재의 것으로 평가되거나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될 미래의 세계 속에서 현재를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현재의 조건과 형편에서 미래를 추측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에서 현재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살아 있고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면서 인간의 실상과 함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광에 눈이 뜨이는 것이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는 생생한 현실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는 신자는 현재의 자신에 대해 실망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현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미래에 이미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고 착각하는 현재의 조건들이 미래에 까지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모든 일이 마무리 될 그 때로 빨려 가는 입장인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조건이란 말 그대로 헛되고 헛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알게 하는 것이 나팔 소리입니다.

 

 

53절에 보면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합니다.

 

 

나팔소리와 함께 인간은 썩을 것이고 죽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존재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것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현재의 세상 영광을 헛되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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