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1 16:09

(2강) 고난과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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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3-7

고후 1:3-7http://onlycross.net/videos/co2/co2-01030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설교>

현대 사회는 수많은 사건 사고로 가득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위험요소들이 주변에 차고 넘칩니다. 자연재해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뜻하지 않은 불행한 사고로 힘들어 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불행한 사고는 아니라 해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들은 정말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인간관계, , 자식, 질병 등등 원하지 않는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들을 겪으며 우리는 불행이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를 얻기 위한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가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이유로 교회를 찾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이 때문인지 교회에서 유행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 위로와 치유의 목회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아픔과 상처가 있고 한이 맺힌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마음에 평안을 찾게 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처럼 강조되는 것이고 사람들 또한 이런 교회를 원하고 찾아가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위한 위로와 치유에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습니다. 물론 진리를 원한다고 하지만 세상에서의 행복에 매몰된 인간에게 진리는 자신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기에 성경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생명의 진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필요 없는 것으로 배척해 버립니다.

 

 

사실 위로와 치유의 목회라는 것에서 십자가 진리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일 뿐입니다. 인간을 위로하고 그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말을 해야 하는데 십자가 진리는 사람이 아닌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도 위로와 치유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서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말하고, 15:26절에서는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말하고, 58:8절의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라는 말씀을 봐도 하나님은 위로와 치유를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를 뿐입니다.

 

 

4,5절을 보면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위로는 타인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기 위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면 괴로움과 슬픔의 상태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기쁨과 평안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이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필요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 무관한 말씀으로 들을 것이기 때문에 이해와 감동이 없는 공허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 받아야 할 자로 여기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위로를 받아야 하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깁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처한 환경이 고달프고 어렵고 힘들다면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위로를 받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이 특별히 힘들지 않고 편안하다면 위로를 필요로 하거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생각이 아예 전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위로가 있다면 그 위로는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위로를 받는 자와 받지 않는 자로 나눠진다면 성경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괴로움이 있든 편안하든 신자라면 누구나 받는 것이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에는 없는 생소하고 낯선 위로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나온다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이 주는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4절에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라고 말한 것처럼 환난 중에 있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또한 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된 신자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가 넘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종의 환각 가운데서 위로를 생각합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평안을 누리게 하는 차원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위로가 그런 것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오면서 그러한 위로를 경험했어야 합니다. 괴롭고 힘들 때마다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면 염려와 불안감은 사라지고 평안을 누리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잠시 동안의 심리적 위안일 뿐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아닙니다. 그래서 환각적인 위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하는 위로를 기대하는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생존 문제로 인한 위로를 하나님께 받고자 한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믿음은 거짓임이 발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바울의 말대로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환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있는 것이지 환난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에게 위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위로는 환난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로가 넘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쳐야 한다는 것이 위로에 대한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환난과 고난을 우리의 현실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과 다른 상황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겪었던 환난과 고난을 압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해도 성경을 통해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해 모진 고초를 겪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부 국가와 다르게 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이해하는 환난과 고난을 말하고 경험할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은 고난을 괴롭고 힘든 상황과 어려움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혹은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배척을 받거나 핍박을 받는 상황에 있다면 자신이 고난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자에게 동일한 상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전도를 해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를 알기 위해서는 고난에 대한 내용부터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5)라는 말에 대해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바울 스스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바울에게도 넘친다고 인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넘치는 고난이 바울로 끝나지 않습니다.

 

 

6절을 보면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을 보면 교회도 사도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워진 모든 교회는 사도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 것 같이 고난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신자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면 사도에게 넘친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넘쳐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점이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우리 주변이나 상황을 아무리 둘러 봐도 고난이 넘친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평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겪고 있는 상황만 생각합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배천 받는 상황들을 종합하여 고난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말에 대해 자연스럽게 바울과 같은 상황을 겪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고난은 바울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렇게 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여전히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교회도 모두가 다 예수님의 뜻에 붙들려서 예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넘치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부름 받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주의 뜻에 의해서 주가 가게 하신 곳으로 가게 되면서 매를 맞고 배척을 받는 일도 겪은 것입니다. 주께서 바울의 인생을 도우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인생을 도우셨다면 핍박과 고난이 없는 좋은 환경이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인생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가 가신 길로 바울을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이 가셨던 것처럼 세상이 가는 길과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이 곧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에 있다면 알게 되는 것은 당연히 죄입니다. 피 흘리는 십자가의 길에 서있을 때 세상의 부와 성공이 보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나의 일을 향한 욕심으로 인해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나를 위해 사는 모든 것이 죄로 펼쳐지게 됩니다. 나로 인해 주가 고난 받고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의 고난이 내게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고난이 넘친다는 것은 고통이 있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고난이 나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 되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 넘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과 동일하게 세상의 것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가난과 육신의 괴로움일 것이고 위로는 가난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겠지만 그런 고난과 위로는 하나님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길로 부름 받은 신자에게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고 잠시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놀이터에 불과합니다. 돈이 있어 육신의 편안함은 보장 받을 수 있다 해도 그 또한 돈에 의한 돈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허용하신 것임을 압니다. 돈으로 마음껏 살게 하시면서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 끝이 심판인 것을 생각하면 세상은 결국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의로 사는 새로운 삶에 대해 아는 자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으로 사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존의 문제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일이 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생명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일의 전부이며, 그 전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기에 세상일에는 개의치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면 이 복음을 세상이 좋아할까요?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세상에서 사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오히려 예수를 못 박은 죄라고 한다면 수긍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가 동행하시는 삶이 곧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50:5,6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말씀을 듣고 알게 하심으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사야가 전한 것은 바벨로 멸망에 대한 것입니다. 그 말이 바벨론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포로로 끌려와서 이미 50년 가까이 살았던 유다 백성들에게는 탐탁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그곳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추장스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사야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습니다. 사람의 뜻에 맞지 않는 말씀을 전달함으로써 고난이 현실의 문제가 되어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신자에게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존재합니다. 세상의 뜻과 맞지 않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도 세상이 원하는 뜻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부름 받은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아 주와 함께 하게 된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입니다. 세상을 사는 형편과 무관하게 우리의 삶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갈 때에도 주가 함께 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가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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