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8 16:08

(3강)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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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1:3-4

고후 1:3-4http://onlycross.net/videos/co2/co2-01030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설교>

기독교인이 상식처럼 생각하는 하나님은믿는 자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만 잘하면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평강과 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고 그 원인을 자신의 믿음 생활에서 찾습니다. 믿음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종교와 무당의 사고방식과도 같습니다. 즉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22:18절을 보면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고 말씀하고, 18:10-11절에서도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당은 신 내림을 받았다는 사람입니다. 귀신의 힘을 받아서 앞일을 예견하고 병도 고치고 부적이라는 것을 써서 재앙을 막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무당이란 소위 자신에게 있는 신의 힘으로 인간의 인생에 개입하여 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 언급하는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진언자, 신접자 등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은 인생의 가치를 위해 신의 힘을 구하는 것은 천국의 백성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인생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천국에 있게 된다면 천국은 세상과 동일하게 서로의 인생을 비교하며 높고 낮음으로 구별하는 습성이 그대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런데 지옥을 천국으로 착각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현실입니다.

 

 

천국은 인간 개인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천국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은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인간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용서라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의 피의 언약의 가치만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무당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재앙은 피하고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미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미신적인 말과 행위가 교회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가치보다 자신의 가치를 위해 도와주는 예수로 둔갑시킨 미신적인 집단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은혜, 사랑, 감사, 찬송 등의 모든 것도 인생의 도움으로 연결되어 해석합니다. 인생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 사랑으로 이해하며 감사하고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송하는 것이 교회에 상식처럼 보편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이라는 열망을 위해 사는 인간에 의해서 신앙이 미신화 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인간의 교회로 전락한 현실의 민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거의 통속적이고 형식적인 용어로 사용합니다. 창조주이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고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면 찬송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또한 자신의 기분에 좌우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 일이 잘 되었을 때의 기쁨에 의한 인간적인 찬송이고 감사라는 점을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찬송하리로다는 말에 이어서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4)라고 말합니다.

 

 

우리는우리를 위로하사라는 말에만 초점을 두게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환난으로 힘들었던 마음에 평강이 있게 해주시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이고 그것을 찬송해야 할 이유로 아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무당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위로를 받았기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하는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난 중에 있는 모든 자를 위로하라는 뜻으로 사도를 위로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단지 자신이 위로 받았다는 것 때문에 위로의 하나님을 말하고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잘못된 생각이 이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서 복 받고 잘사는 것을 당연한 신앙의 이유와 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잘 살게 하시면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에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웃을 돕고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복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명분은 이웃을 돕는 것이지만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분명한 것은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일하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에게 구축되어 있는 신에 대한 상식과 통념과 자기 열망으로 제멋대로 조작함으로써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 아닌 하나님으로 교회가 점령된 것입니다.

 

 

13:6-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허탄한 묵시와 거짓된 점괘였을 뿐이라고 합니다.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는 것입니다(13:16).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고 그것을 당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현실이 지금의 교회에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성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고난이 지나간 후가 아니라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찬송의 여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46:1-2절을 보면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평생에는 기쁜 날이 있고 슬픈 날도 있습니다. 따라서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는 말은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찬송하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과연 슬픈 날에 찬송이 가능할까요? 슬픔만 바라본다면 찬송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슬픈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인해 감사와 찬송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찬송은 성령 받은 신자에게만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시 23:5,6절을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고 말합니다.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는 고백은 살아있는 동안의 모든 일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뜻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았다는 것이고 고난과 환난 또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기 일이 잘되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평생을 하나님이 도우셨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왔음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감사든 찬송이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참된 복의 세계로 인도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진심으로 좋은 것, 유리한 것, 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모든 육체를 풀과 같고 육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합니다(벧전 1:24).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도 잠시일 뿐 마르고 떨어질 날이 곧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부한 자에 대해서 곧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육체의 번성과 화려함과 가치에 인생의 의미를 두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반드시 있을 장래 일을 믿지 않거나 무시하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도우실 것인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의 인생의 가치에만 뜻을 둔다면 그것이 과연 십자가를 향한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난을 받되 예수를 믿는 자는 고난이 없는 평안을 누리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세상의 평안이 하늘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일까요?

 

 

16:24-25절에 보면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나가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익이 끊어진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에게로 끌어가 로마 사람인 자신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합니다. 그로 인해 매를 맞고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깊은 감옥에 갇힌 것을 인간적인 시각에서 판단한다면 복음 전파에 지장이 발생한 것입니다.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사람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수를 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혔다면 복음 전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감옥에 갇힌 상황이라면 복음 전파를 위해 감옥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옥문이 열린 다음에 감옥을 탈출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수순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여전히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찬송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즉 자신들이 처하는 모든 상황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는 상황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깊은 감옥에 있던 죄수들이 듣게 되고 간수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16:33). 바울과 실라 개인적으로는 깊은 감옥에 갇힌 것이 절망적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일하시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는 도구라는 인식에서 생각하게 되면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에게 찬송의 이유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상황이나 형편에 매이지 않는 자유자이기 때문에 평생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의 의미와 이유를 알게 되면 찬송과 함께 환난과 고난에 대한 말이 등장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는 세계입니다. 어떤 육신의 형편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계에 속한 것임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우리 세계를 세워주기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세우고자 하시는 우리는 그 일에 부름 받고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평생도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필요하다면 환난과 고난도 주시고 평안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편과 처지라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고난과 함께 하나님이 위로가 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이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이었음을 아십니까?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하나님이 주신 형편이라고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집중하여 생각할 것은 모든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나타내고 증거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가 우리 마음에는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마음에 맞게 일하십니다. 이것만 생각하시고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기를 소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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