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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2:5-9

고후 2:5-9http://onlycross.net/videos/co2/co2-02050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설교>

인간은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일들로 인한 근심과 염려를 피할 수 없습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근심과 염려를 짊어지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마음의 수양을 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심하고 염려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아는 대로 마음이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근심하고 염려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12:29)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생존의 문제로는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심한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생존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먹고 마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분명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의 삶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근심과 염려와 불평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총동원전도주일이라는 것을 한다고 했을 때 교인들을 그것은 믿지 않는 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신앙적인 일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적인 일이라면 기쁨만 있는 것이 당연한데 실제로는 경쟁, 비교, 시기, 낙심 등등 인간의 속성들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은 몇 명 데려 왔는지 의식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비해 성과가 없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이 초청한 사람이 오지 않을까 근심하는 모든 것이 명분은 신앙이지만 신앙이 아닌 인간성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심하고 염려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던 바울에게도 근심이 있었을까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9:1)라는 말을 보면 바울에게도 근심은 있었습니다.

 

 

또한 4절에서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바울의 근심과 염려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 또는 사랑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인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도 바울의 관심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5절을 보면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다른 사람을 근심하게 하는 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근심하게 하는 자가 누구이고 무슨 일로 근심하게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부터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근심하게 하는 문제와 문제를 만든 사람에게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교회에 근심하게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울을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근심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 일인데 교회는 근심한 것입니다. 같은 문제인데 바울에게는 근심이 되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근심이 됩니다. 같은 문제를 서로 다른 시각, 다른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구에게 있을까요? 당연히 고린도 교회 모두에게 있습니다. 전혀 근심할 문제가 아닌데 근심 하는 것으로 관심이 사도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교회에 근심하게 하는 자가 있게 됨으로 해서 교회의 관심이 복음을 전한 사도와 다르다는 것이 발각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초점은 교회가 무엇에 관심 두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하는 자나 근심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이 십자가로만 향해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에 관심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길에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와 교회를 하나로 인식하고 십자가에 대한 관심을 교회에 관심 두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교회는 주의 피로 사신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입니다. 증거는 교회로 인해 근심하는 것입니다. 주의 피로 사신 교회는 인간이 근심할 이유도 권한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로 인해 근심한다면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교회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욕망의 산물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교회가 아니라 인간이 주인이 되어 운영하는 종교 단체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근심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교회를 근심한다면 관심이 무엇으로 향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다운 모습을 인간의 욕망이라는 터 위에 세워두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여겼던 우리 자신들이 정작 믿음에서 떠나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은 하나님이 드러내시고 보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볼 수도 알 수도 없도록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 선함으로 단단히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대상은 모두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실체가 근심거리가 되는 것이지 보이지도 않는 것은 근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관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에 대한 근심도 보이지 않는 나라에 대한 근심 같지만 사실은 보이는 자기 문제로 인한 근심입니다.‘내 몸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될까?’의 근심이지 천국을 근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를 근심하는 것은 교회를 보이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은석교회를 근심한다면 은석교회를 보이는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은석교회의 부흥의 문제가 근심이 되고, 재정의 문제가 근심이 되고, 불화로 인해 근심한다면 교회를 보이는 인간의 모임, 단체로 인식하는 버릇 때문이라는 것부터 감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바울이 믿음이 좋아서 근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달랐음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합니다.

 

 

근심하게 한 사람은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도 차라리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벌을 주라는 것인지 용서하라는 것인지가 모호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생각, 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무지 바울의 말을 따라 갈수 없습니다. 결국 종국에는 미로에 갇혀 헤매는 결과만 초래됩니다.

 

 

바울은 교회를 근심하게 한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교회가 이미 벌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벌을 주지 말고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미 벌을 주었다 해도 그만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뜻일까요?

 

 

어떤 경우이든 우리는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근심하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할 성품이 되지 못합니다. 그를 볼 때 마다 당신 때문에라는 원망과 비난만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모른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하고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8)고 말하는 것은 용서와 위로라는 사랑을 실천하여 교회다움을 보이라는 것이 아닌 다른 뜻이 있는 것입니다.

 

 

9장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근심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스라엘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됨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근심이었습니다.

 

 

9:15-16절을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은 그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이 아니라 미움 받고 심판 받아야 할 자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생각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혈통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저주 받을 자의 모습이기에 바울에게 큰 근심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심판 받을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역사되는 현장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것은 인간의 모든 공로와 의로움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 받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와 교회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용서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인한 바울의 근심이 무엇일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보이는 교회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심하게 하는 자로 인해서 근심하고 그를 벌주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바울의 근심과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교회에 관심을 둡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주일에 예배로 모였을 때 사람이 함께 하는 교회가 보이고 존재하는 것이지 예배가 끝나고 흩어지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그저 고정된 지역에 세워진 예배당이라는 건물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배당도 목사도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로 알고 있는 것도 사람이 모여서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특정 교단에 소속하고 당회, 제직회라는 조직을 해서 단체를 운영하고 활동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교인들이 말하는 교회 부흥이라는 것은 단체의 규모가 확대되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교회라 하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 근심합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바울에게 교회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 받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용서 받은 것은 자신을 저주 받을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증거됩니다. 이들이 함께 하는 것이 교회라면 교회는 누가 누구를 근심하게 하고 벌 주고 벌 받는 관계로 함께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모두가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근심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위로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근심하게 하는 자가 있을 때 그를 용서하는 것은 문제를 덮고 없는 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타인을 근심하게 하는 자로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함께 하는 용서이고 신자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위로입니다.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는 것은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기 위한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회됨, 신자의 신자 됨이 무엇인가를 알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자 된 모든 일의 공로가 주께 있음을 알면 쉬운 문제입니다. 모든 공로가 주께 있다면 인간에게는 공로로 인정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의 공로만 자랑하고 높이게 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관계로 함께 하는 교회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저주의 존재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저주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피가 저주에서 건지는 능력이 되는 것이지 저주 받지 않을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주의 존재가 인간이 본질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의 특징은 자신을 저주 받을 자로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주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함께 하는 것이 교회라면 교회는 우리가 근심할 대상이 아닙니다

 

 

고후 7: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근심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세상 근심은 보이는 것에 대해 근심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근심하는 것도 세상 근심입니다. 근심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근심이 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교회가 근심거리가 되면 자기보다 열심이 없는 사람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근심을 사망을 이루는 것으로 말합니다.

 

 

교회는 주의 공로만을 증거 할 도구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교회라면 신자라고 하는 우리가 주의 공로가 아닌 나의 공로와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고 교회됨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의 공로와 의를 높이고자 하는 자신이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이 이끌어 가는 것이 십자가의 용서이며 용서 받은 자로 함께 함으로써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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