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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2:12-17

고후 2:12-17http://onlycross.net/videos/co2/co2-02121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설교>

우리는 행동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누군가의 옳고 그름이나 믿음이 있고 없고를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 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믿음의 행동, 믿음이 아닌 행동, 신자다운 행동, 신자답지 못한 행동 등등이 은연중에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아무리 옳고 바른 말을 한다 해도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그가 했던 말까지도 위선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인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시선이고 판단입니다.

 

 

바울이 비난을 받고 사도직에 대한 의심의 말까지 듣게 된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행동을 도무지 사도답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고린도에 두 번 방문하기로 약속하였다가 약속을 파기하고 계획을 변경한 것이약속을 지키지 않는 신실하지 못한 사도라는 비난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본문 또한 비난의 빌미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12,13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습니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주께서 열어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은 것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도를 만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하여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 결정이 타당했다고 생각합니까? 디도를 만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문이 열린 드로아를 떠나는 이유였다는 것은 사실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을 더 우선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분명 복음을 위한 사도답지 못한 행동으로 비춰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한 후에 에베소로 돌아와 편지를 디도에게 주어 고린도를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사정에 대해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의 사정이 어떠한지는 바울에게 궁금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도와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어긋난 것인지 만나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사정이 궁금하고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해도 복음의 문이 열린 드로아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우리 생각에 주 안에서 문이 열렸다는 것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간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주가 주신 복음의 기회를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행동은 비난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인해 근심이 있었고 교회 소식을 알려줄 디도를 만나지 못한 것 때문에 근심이 더욱 커진 것이라면교회 문제를 주께 맡기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신데 사람이 교회로 인해 근심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다면 주께 맡기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행동만 보게 되면 사도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14-15)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행동입니다. 행동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냄새와 향기가 되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동을 누군가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포장하는 헛된 말일 뿐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그리스도를 나타내거나 알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말씀드린 것처럼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떠난 바울의 행동은 우리에게 사도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신자의 어떤 행동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거나 말씀을 행하지 못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형기를 잃어버린 것으로 말하는 것은 복음에 대해 무지하고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설교에서는 신자다운 행동을 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향기를 잃어버린 꽃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향기를 잃어버린 꽃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꽃은 피어날 때부터 향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꽃 자체가 향기입니다.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며 그 자리에만 있다 해도 향기를 간직한 꽃으로 존재합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본질입니다. 신자가 잘못을 범한다고 해서 향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이 있고 성적 문제가 있고 다툼과 경쟁이 있었다 해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향기 아닌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애당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행동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게 된 적이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신세를 진 것 때문에 그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인이 된 것이지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함으로 알게 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향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오해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향기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냄새가 아닙니다.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꽃향기와 같은 향기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단어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과 일방적인 이해가 성경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은 섣불리 안다고 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말합니다.

 

 

향기가 모든 사람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좋은 냄새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향기라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냄새로 다가와져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라면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냄새로 다가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심으로 사망과 생명으로 분류하는 역할로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알게 된 신자입니다. 세상이 칭찬하는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여 누군가를 예수 믿게 하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간 바울의 행동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비난이라는 좋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이 잘못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를 비난한 것이 잘못일까요? 문제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런 것이 옳은 행동이다는 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시각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자신의 의식에 대해 눈치 채지 못한 채 버젓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하고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행동에 대해 어떤 고민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행동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드로아를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 안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떠나버리면 무책임하다는 비난 여론으로 돌아올 것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로 두 번 가겠다는 애초의 계획도 지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드로아를 팽개친 것이 아닙니다. 드로아보다 고린도 교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행동을 저울질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도답게 보이려고 행동하지 않았고 전도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행동을 꾸며내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드로아에 남든 떠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울을 행동을 보고 판단한다면 그것을 과연 복음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어떤 행동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것이다. 그러니 내 행동을 보고 나를 판단하지 말아라라고 하면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한다면 그 또한 자기 행동에 가치를 두고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악한 발상이며 복음은 사망에 이르는 냄새일 뿐입니다.

 

 

바울의 행동을 복음 안에서 제대로 보게 되면 바울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말하는 우리가 율법에 묶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율법에 묶여 있으면서도 마치 율법에서 벗어난 것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고 율법적이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고 또 그렇게 자신을 알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무지하고 어리석었다는 것을 바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고 더 좋은 행동을 떠올리게 되는 것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은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살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나름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삶에 대한 인정이고 대접입니다. 타인의 삶과 자기 삶을 비교하고 평가할 것이고 잘하고 못함을 따지면서 그것으로 믿음을 저울질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행함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고 잘하는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입니다.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했는가를 구분 짓자는 것인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인정받는다 해서 그것이 믿음의 증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신자의 세계를 뜻하는 것인데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밝히고자 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 됨일까? 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복음을 알고, 율법에 매이지 않고,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그러한 자기에게 그런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 왜 저렇게 하지라는 판단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함에 매인 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항상 하나로 모아지게 됩니다. 인간은 도무지 구원될 자격이 없는 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른 행동 바른 삶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은 향기가 되지 않습니다. 피하고 싶은 악취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이 선과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믿게 하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의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에 결국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이목과 판단을 의식해서 말과 행동을 꾸미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이 가치 있는 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죄인 것을 생각지 못합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도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부인하는 결과만 초래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영원한 부활 생명을 이루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다는 식으로 자신을 나타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발산될 뿐입니다. 자신에게서 그 냄새를 맡게 하시면서 주가 구원이 되고 생명이 됨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는 것은 향기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에게서 사망의 냄새를 맡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향해 향기를 발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 존재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향기는 세상의 도덕과 윤리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과 윤리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향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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