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4 16:25

(16강) 말씀의 혼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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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2:16-17

고후 2:16-17http://onlycross.net/videos/co2/co2-021617.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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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설교>

성경은 천국과 지옥을 말합니다. 육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인생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관심 밖의 주제이겠지만 인간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교회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 분명히 증거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이 둔해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종교성조차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저는 현대 교회에서 드러나는 세속화 현상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인간이 세속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존재가 모였는데 세속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세상에서 자기 성취를 통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이미 자신이 종교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명목만 유지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신앙과 신앙생활은 선명성을 잃은 채 상투적인 것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문제를 간파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에 충실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명목의 활동을 통해 교회됨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천국과 지옥, 생명과 사망의 문제에 중요성을 두고 집중하는 것은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말씀이 혼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에서 일하며 얻는 유익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론적으로는 주저 없이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겠지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들여다보면 답하기가 곤란한 문제입니다. 복음을 따라서 신자로 살고 싶은 마음은 있다 해도 세상일에 치우치며 흔들리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일로는 흔들린다 해도 신자가 생명에 속한 자라는 사실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신분의 사람이 된다 해도 그것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에 속한 신자라는 신분은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6,17)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부터라는 말은 운명이 사망으로 시작하는 사람과 생명으로 시작하는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사망과 생명으로 선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사람이 없고 생명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에 인간의 실력과 조건은 전혀 고려된 바가 없음을 말해줍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생명의 구원은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된 세계인 것이지 인간의 어떤 조건도 개입된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이 명확히 구분되어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과 사망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고 뒤섞임으로써 말씀의 혼잡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시대에 제가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참된 내막입니다.

 

 

바울은 롬 5:12절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망에 속한 존재입니다. 사망에 속했다는 것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깨닫고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존재가 아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생명 또한 선물입니다. 때문에 믿음도 생명도 우리가 노력하고 힘써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말씀이 혼잡 되지 않은 복음입니다.

 

 

성경에는 사망과 생명의 경계가 명확합니다. 사망은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세계로 드러나는 반면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경계가 명확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이 아닌 인간의 공로와 의로움과 열심 등이 조건이 된 은혜와 사랑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열심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믿음을 인간의 행함과 혼합하여 행함이 믿음의 열매, 증거로 부각되는 것이 변질입니다.

 

 

33: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살아계시는 분으로 존재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내 열심으로 나를 위해 산다 해도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포기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서 자랑될 인간의 공로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그리고 인간의 공로는 결코 함께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앞에서 성경에는 사망과 생명의 경계가 명확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때문에 사망과 생명은 철저한 차별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차별성이 살아있는 것이 복음이고 말씀이 혼잡 되지 않은 것이며 신자 역시 이 차별성이 살아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복음에는 사망과 생명에 대한 차별성이 없습니다. 사망에도 생명에도 인간의 악함과 의로움이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일 5:11-12절에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생명의 문제는 분명 차별적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만 생명이 있는데 아들이 있고 없고는 우리 뜻으로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다는 것은 단지구원 받고 천국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의 행함이 구원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의 의미와 내막을 아는 신자는 인간의 무능력을 고백하게 됩니다.

 

 

요일 4:5-6절에서도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차별성이 드러납니다. 복음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로 세상에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울 말대로 하면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도록 되어있는 자는 복음을 듣지 않고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도록 선택된 자는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실력이나 자질이 아니라 택한 자에게 보내신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차별성이 드러나는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생각하고 교회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혼잡하게 되어 차별성이 모호해지고 생명과 사망의 경계가 무너진 복음 아닌 복음이 교회를 장악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로 인해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된 모든 일에 우리의 선함이나 공로, 열심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음을 분명히 주지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드러내는 차별성입니다. 이 복음이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로 작정된 사람에게는 거부할 수밖에 없는 말로 들림으로 사망의 냄새가 됩니다. 하지만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기로 작정된 사랑에게는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로 인한 걱정과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구상하지 않아야 합니다.‘나는 이런 교회를 만들겠다라고 작정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간의 의도와 수단과 방식이 섞이게 되고 혼잡 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만 증거 하면 되는데 교회가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이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의미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물론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선함과 도덕적 행위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선한 행위를 하나님이 다르게 보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인간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은 속이 텅 빈 공갈빵과도 같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가르치지만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교회 일에 한결같은 열심을 보일 수 없습니다. 때로는 외부 형편에 의해서, 때로는 자기감정과 기분에 의해서 달라집니다. 만약 열심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모든 형편과 감정을 극복하고 변함없는 열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지만 사소한 일로도 감정과 기분에 기복이 있고 그것이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열심은 믿음과 별개 문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47-49절에 보면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고 작정된 자를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것 또한 주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있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빛으로 삼아 주의 말씀을 두루 퍼지게 하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구원의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이런 교회가 되자라는 것은 교회를 자기 가치의 성취 수단으로 여기는 인간의 욕망일 뿐입니다. 이러한 욕망에 의해 말씀이 혼잡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정말 중요한 것은 온전히 복음의 본질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교인의 숫자가 줄어들든 늘어나든 걱정하거나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됨의 증거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증거 하는 복음에는 생명과 사망의 경계에 대한 분명한 차별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공로는 철저하게 배제하고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한 구원만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순전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의해 확인되는 인간의 존재는 죄인이라는 사실로만 드러납니다.

 

 

복음은 다만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만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총과 자비하심에 일치된 자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에 일치된 삶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을 써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는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은총과 자비라는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불만을 나타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떤 인간성이 바울이 하나님께 받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함으로 말하는 복음에 불만을 가지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알고 믿으신다면 그 복음은 차별성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주지하기 바랍니다. 차별성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말씀이 혼잡하게 된 것일 뿐입니다. 말씀을 안다고 하지만 그 말씀에 나를 연결시키고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얻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그것이 이미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장본인들입니다. 이것이 자기 인식으로 자리한다면 신자는 자신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성과급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어진 일에 대해 이루어 낸 성과에 따라 추가로 지급하는 돈입니다. 이런 제도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며 더 많은 성과를 이루기 위해 힘을 씁니다. 하지만 믿음의 세계에는 성과급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 낸 성과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믿음을 내가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에 따른 성과급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가 복음을 위해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것이 마땅한 죄인이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명에 이르게 됨을 고백하게 하는 복음에 인간의 것을 섞지 않은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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