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8 15:51

(18강) 새 언약의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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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3:4-6

고후 3:4-6http://onlycross.net/videos/co2/co2-030406.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설교>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입니다. 돈키호테가 기사 이야기책을 읽다가 망상에 빠져서 로시난테라는 늙고 여윈 말을 타고, 종 산초 판사와 함께 기사 수업을 다니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줄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돈키호테에서 제가 기억하는 한 장면은 풍차를 적군의 장군으로 착각하고 싸우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풍차와 싸우겠다고 달려드는 것부터 정상적이지 않은 헛된 망상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이유로 현실과 동떨어져 공상과 망상에 치우쳐 살아가는 사람이나 상식에서 벗어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돈키호테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마치 돈키호테 양성소, 돈키호테처럼 망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소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를 맞서 싸워 이겨야 할 대상으로 착각하는 것이나 창조론을 부정하는 진화론 또한 싸움의 대상으로 착각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신자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성화라는 고지를 향해 돌진할 것을 촉구하는 것도 돈키호테가 꿈꾸는 망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분명한 사실은 돈키호테와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싸워야 할 대상을 항상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착각은 신자라 지칭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경쟁하고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키호테가 풍차를 풍차로 보지 않고 적으로 착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체를 지체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싸움의 대상은 있습니다. 싸움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적이 있다는 뜻이고 적과의 싸움에서는 승리해야 하는 것이 싸움의 법칙입니다. 문제는 싸움이 대상이 있고 적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힘으로 이겨야 하거나 이길 수 있는 것은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적과의 싸움에서 항상 패하는 실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싸움의 대상에 대해 알게 되면 우리는 계속 실패하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이 있는 자가 신자로 드러나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은 신자는 도덕적이어야 하고 바른 삶을 통해서 세상이 칭찬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을 행동을 싸움의 대상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도덕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심판의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도덕적인 행동이 있다 하여 그것이 의로움이 되고 부활의 생명에 이르게 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행동, 행함의 문제는 싸워서 이기고 고쳐야 할 적도, 구원을 돕는 의로움도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믿음의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싸움의 대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에게 적이며 동시에 하나님께도 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죄에 사로잡힌 죽음의 존재로 살아가게 된 것이 우리의 본래 운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2-13)

 

 

바울의 이 말은 마치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고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의 길로 갈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이 있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자기의 선함과 의지로 죄를 이기거나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아는 바울이 우리의 힘으로 죄를 이기라는 뜻의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6:14절을 보면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할 방법은 은혜 밖에 없습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의 선함과 의지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죄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고 길이며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능력을 받아 죄를 이기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이든 믿음이든 자신이 능력을 받아 힘 있는 자가 되어 죄를 이기고자 하는 것이 죄 아래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로 드러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부도덕하거나 법을 어기는 행동,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능력 있는 자가 되어 말씀을 실천하고, 믿음의 일을 행하고, 죄를 이김으로써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드러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편지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드러내고 전하는 자신의 편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기를 위해 사는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따라서 싸움의 대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일꾼이라는 말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꾼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일꾼의 본분을 저버리는 것이고 그것이 일을 맡긴 주인에게 불충하는 것이 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열심히 일한 일꾼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상입니다. 반대로 게으른 일꾼에게는 그에 따른 징벌이 주어지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자기 마음의 편함을 위해서라도 교회 일을 등한시 할 수 없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한 일꾼이 아니라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말을 합니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을 위해 일하는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새 언약의 일꾼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아예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인의 보편적인 상태입니다. 단지 일꾼이라는 단어에만 마음을 두고 교회일에 부지런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의 모습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일 뿐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일꾼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세상에 증거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신자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새 언약이라는 구원 방식 외에 다른 것은 구원과 무관하며 어떤 방식으로도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구원의 효력에 대해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사람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사람이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신자가 착하고 바르게 살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교회생활에 충실한 것이 도무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르게 살고자 하고 행동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르게 사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을 구분하고 그것으로 구원의 여부를 평가하고 상과 벌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이라는 구원 방식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2:20절에 보면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와 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함이나 열심, , 어떤 것도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토대로 하여 의로운 자로 인정받고 복과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율법으로 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바르게 살고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세상의 기준과 시각으로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과 기뻐하시는 것으로 구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드러나는 것은 저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고 우월감을 가지고 경쟁하는 모습들입니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복음을 듣는다 해도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자기에게로만 집중된 관심 속에서 지체로 고백했던 이웃들과 경쟁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기 때문에 돈키호테와 같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37장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을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이 뼈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고 생기가 들어가게 하셔서 살아나게 하시고 이들을 가리켜 큰 군대라고 하십니다. 마른 뼈들을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군대는 싸움을 위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적과의 싸움을 위해 마른 뼈를 군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생기가 들어간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 받은 신자와 같습니다. 생기가 들어감으로써 알게 되는 것은 자신들이 마른 뼈였고 소망이 없는 죽음의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겔 37:11절에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겔 37:14절에서는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되는 것을 보여주신 이유가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한 바벨론과 더불어 싸워 이기라는 뜻일까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을 이스라엘에게 두어 살아나게 하신 것은 소망이 없는 마른 뼈인 자신들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일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이기시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판에 쓰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게 하셔서 알게 하신 그 내용입니다. 소망이 없는 마른 뼈였다는 자신에 대한 자각,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실패자라는 자각,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쓰여진 내용입니다.

 

 

골짜기에서 생명이 없는 마른 뼈로 뒹굴다가 생기가 들어와 살아난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였을 때 모두가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서로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생명이 없는 마른 뼈로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아질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으로써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행하거나 이루어야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른 뼈로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자신이 소망이 없는 마른 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시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살아나게 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새 언약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일꾼으로 뭔가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의 헛된 생각일 뿐입니다. 자신을 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채 자신으로 말미암아 자기 의와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망상일 뿐입니다. 결국 인간들끼리 자기 것으로 만족하고 흐뭇해하는 것일 뿐 하나님께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훼방하는 원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의 일꾼의 가치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은혜로 평가됩니다. 십자가의 피로 용서 받은 은혜를 알게 되고 주님만 높이고 자랑하고자 하는 신자 되었다는 것이 일꾼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의 가치는 자신이 소망 없는 죽은 자이며 실패자임을 알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앞에서 애통해 하는 것에 있습니다.

 

 

율법으로 드러나는 것과 성령으로 드러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일꾼과 바울이 말하는 일꾼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죽이고 살리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대한 분별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신자로 지칭하면서도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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