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5 15:52

(19강) 더 큰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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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3:7-11

고후 3:7-1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3071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설교>

교회의 존재 이유와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장래 일과 연결하여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입니다. 용서를 아는 자와 알지 못한 자로 구분하여 오른편과 왼편에 두시는 것이 장래에 드러날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날이 이르면 이 모든 일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믿음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장래에 있을 이러한 현실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의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이 이루실 장래 일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는 자로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교회를 목적으로 삼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적이라면 그것은 스스로 장래 일에 관심이 없고 무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목적하는 교회는 사람 수와 헌금, 교회가 행하는 사회적 봉사나 활동, 즉 부요하고 화려함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장래 일이 이루어질 때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되어 버려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장래 일을 생각하고 장래 일을 위해서 함께 하는 교회라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마음 뺏기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은 교회로 모이는 신자를 교회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로 하여금 교회를 자기 목적과 영광으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목적이 되면 인간의 행함을 포기할 수 없게 됩니다. 소위 영광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간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선행으로 인정하는 구제나 사회봉사 등의 가치 있는 행함으로 세상으로부터 칭찬과 박수 받는 것을 교회의 영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자기의 길로 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이 어지러워진 교회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교회를 알지 못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와 의미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이 안다고 하는 교회는 건물에 십자가를 세우고 간판을 붙이고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종교단체일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 아닌 것을 교회로 생각하고 윤리 도덕이라는 선의 기준과 시각에서 평가하는 것은 성경적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교회의 영광으로 여긴다면 그 또한 세상과 동일하게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들어가서 출발해야 합니다. 교회를 모르고서는 교회에 대해 말하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때문에 누구든 교회를 목적으로 한다면 바울의 말은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이면 조직을 만듭니다. 조직을 만드는 기본적인 이유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각자 분산되어 있는 개인을 결합함으로써 강하고 확대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직이 강해지면 그 조직에 속한 자신 또한 강한 힘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조직을 키우고 확대하는 일에 힘을 쏟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탄탄한 조직으로 구성된 교회라 해도 십자가의 용서에 대한 개념이 희미해져 있다면 이미 무너진 교회입니다. 결국 관건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교회의 성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핵심의 요소로 여기지 않으면 교회는 밑 빠진 항아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밑 빠진 항아리는 겉은 멀쩡하게 보여도 항아리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남들이 밑 빠진 실제를 보지 못하고 겉만 보면서 멋있다 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어 항아리라 이름 하지만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라 하는 지금의 우리가 이러한 형편에 있는 것은 아닌지 고심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교회됨을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로 표현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직분에 대한 말을 합니다. 직분이라 하면 우리는 자연히 목사, 장로, 집사 등을 떠올립니다. 교회의 조직에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직분을 맡고 있지 않으면 직분이 없는 평신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직분은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직분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7,8절을 보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영의 직분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새 언약의 일꾼 됨을 말합니다. 모든 신자가 새 언약의 일군으로 부름 받았음을 생각해 보면 영의 직분이란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모든 신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제도를 기반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조직 안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된다 해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안에서는 그러한 구분은 사라지고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영의 직분자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투표로 선출되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때문에 인간이 세운 직분에 비할 바 없이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영의 직분입니다. 목사보다 장로보다 더 영광스러운 직분자로 부름 것이 신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세운 직분을 과시하거나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혹여 목사를 목사 아닌 평신도와 다른 신분을 가진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교회라는 조직에 매인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위한 목사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예수를 이용하는 종교전문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영의 직분에 담긴 영광된 의미를 모르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신자라 이름 하는 거룩한 위치에 있게 된 것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 된 것보다 목사, 장로 되는 것을 더 영광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목사나 장로로 수고한 사람이 아니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수고한 사람들이 들어간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순히 신자로 존재하는 것을 재미없어 합니다. 교회에서 신자는 많지만 목사 장로는 소수이고 일반 신자들 위에 위치한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 선출에서 다른 사람에게 밀리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를 장래 일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래 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것이 영광되고 화려하고 자랑거리가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새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는 가치 없는 것일 뿐입니다.

 

 

34:29절에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산으로 올라가 증거의 두 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내용입니다. 광채는 모세 때문이 아니라 모세가 들고 있던 증거의 두 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것입니다. 증거의 두 판이 산에서 내려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두 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는 소멸되어야 할 존재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지기에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없어질 영광이라고 합니다. 만약 모세 얼굴의 영광이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이었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요? 증거의 두 판에 담긴 말씀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리고 정죄의 결과는 죽음이고 소멸이기 때문에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6). 따라서 모세의 영광이 영원한 것으로 남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정죄 받아 죽음에 이른 자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없어질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이 우리를 정죄함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말씀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위해 사는 것보다 나의 현실을 지키고 내 인생을 위해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저주의 존재입니다.

 

 

이 같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저주 받아 죽으심으로 죄가 용서된 것이고 신자는 예수님의 용서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자신을 살리는 것은 자기의 선행이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값없는 용서라는 참된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의 직분자로 부름 받은 신자의 신자다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용서로 마음이 향하고 감사와 기쁨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더욱 넘치는 영광이 있는 신자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신자를 두고 영의 직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의의 직분입니다.

 

 

의의 직분은 의로운 삶을 살고 실천하여 의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는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늘의 의가 우리에게 증거 되고 드러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의의 직분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의 행함을 높이고 자랑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뜻합니다. 그들이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영광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요? 영광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기보다 나를 영광의 존재로 높여주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십자가를 말하는 우리 스스로 십자가를 무시하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 또한 무시합니다. 더욱 넘치는 영원한 영광이 아니라 썩어질 세상 영광으로 자신을 광채 나는 존재로 만들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본심이 말씀으로 정죄를 받고 예수님이 이루신 의의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무엇보다도 모든 죄를 덮으신 피의 은혜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는 의미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가치와 영광으로 삼고자 했던 것들의 하나하나가 무가치한 것으로 우리 안에서 버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존재 이유와 의미는 그리스도 한분에게서만 찾아야 합니다. 선행이나 도덕과 윤리에 교회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두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됨을 무시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것으로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육신의 생각일 뿐이고 바울은 그것을 사망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의 분파는 더욱 영광된 것을 알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의 직분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분파가 발생하며 바울에게 베드로에게 아볼로에게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자기 영광을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히 여김 받은 것이 더 큰 영광이 된다는 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지 않고 추천서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바울을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이 한 말을 정확하게 지키고 신뢰 있는 사람에게 받은 추천서가 있고 세상을 감동시킬만한 선행으로 칭찬을 받는다 해도 그것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영원한 영광입니다. 우리가 영광으로 알았던 것들은 영원한 영광을 알게 됨으로써 영광이 아닌 것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10,11절에서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영광으로 알았고 영광으로 삼고자 했던 것들은 더 크고 영원히 있을 영광 앞에서는 빛을 잃게 됩니다. 선행을 실천하고 지극히 윤리적인 모습을 자기 영광으로 삼았다 해도 십자가로 드러난 더 큰 영광을 알게 되면 영광으로 여겼던 모든 것의 허망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더 큰 영광을 알았다면 바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더 크고 영원한 영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용서 앞에 굴복했을 것입니다.

 

 

17:4,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분은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심으로 구원 받았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부여된 영의 직분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선행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선행을 영광과 연결하여 가르치는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더 큰 영광을 알지 못하기에 가치 없는 것으로 형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영광은 그리스도 한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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