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4 15:07

(26강) 무너질 장막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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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4:18-5:1

고후 4:18-5: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418050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5: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설교>

오늘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태도를 보면 인간의 전통과 관습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지금의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보다는 구태의연한 신앙형식을 절대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대한 문제는, 알고는 있되 정작 자기 신앙에서 절대화되고 있는 것은 부활생명이 아니라 신앙형식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형식에 담겨지지 않고 담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을 형식에 담아 나타내고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닌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는 바울의 말과 달리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형식을 통해서 자기 신앙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교회 생활의 열심은 물론이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거나 타인과의 좋은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믿음으로 행하는 신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정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것에 주목하게 하는 사탄의 유혹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제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선을 향한 욕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향상되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자신이 믿음 있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선을 추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죄를 발산하는 인간의 성품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어떤 노력과 수고로도 개선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행하는 형식으로 신앙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됨에 초점을 두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오류임을 알아야 합니다.

 

 

17:26절에 보면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내 안에 들어온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셔서 죽음에 있는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시고 예수를 부활하게 하셔서 우리 또한 예수와 함께 생명에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으로 신자는 모든 것이 채워진 것입니다.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랑 받기 위해서 우리가 내어 놓아야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사랑을 받기 위한 종교적 노력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앙의 형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역시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물론 인정한다고 하시겠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면밀히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고, 그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함께 하고 있다면 신자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죄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이것이 신자다운 것이다라는 관습적이 기준에 매여서 형식과 행함으로 자신의 신자 됨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사랑을 주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신앙을 점검해 본다면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사랑에 주목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열심과 성의를 다하려고 하는 형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생명의 능력이 되는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이 관습적이고 구태의연한 형식에 주목하게 하고 신앙의 기준과 원칙으로 절대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는 것이 신자가 항상 주지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육신을 장막에 비유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육신이 사라지는 것을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장막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잠시 기거하기 위해 설치한 집입니다. 이처럼 육신으로 세상에서 사는 것을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몸을 장막 집으로 묘사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비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의 인간 됨이나 신앙을 비난하고 판단하게 될 때 그 이유와 기준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이는 것을 주목하기 때문이고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영원하지 않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결국 육신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그 수준은 점차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열심, 그리고 성품과 인격적인 면에서 발전되는 측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고,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신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허망한 기대에 매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동과 삶을 확인해 보면서 전혀 나아진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면 내가 과연 신자인가?’라며 실망하고 불안감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들었던 교회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교회로 인정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던 교회를 보면서우리는 고린도 교회처럼 하지 말자는 교훈적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와 전혀 달랐습니다.

 

 

고전 1:2-3절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문제투성이인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고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바울이 보이는 것을 주목하는 자였다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눈에 드러난 문제들을 파헤치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자들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장막에 포함된 모든 것이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단순히 육신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과 연관된 모든 것은 육신과 함께 무너지는 것이기에 주목할 가치가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막 집이라 해도 필요한 것은 있을 것이고 치장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단지 장막 집이 있을 동안 필요해서 잠시 있는 것일 뿐 장막 집이 무너져도 존재하는 영원한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앙을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참된 가치와 영광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있음을 분명히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성품은 보이는 것을 주목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알지 못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성경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증거 한다 해도 자연히 보이는 것에 이끌리고 욕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믿음을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음으로 해서 신앙이 오히려 고민과 갈등과 혼란이라는 짐으로 가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예수를 믿는데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은 상태로 인한 불안감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한다는 바울의 말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단순히 육신의 생물학적 죽음에 국한된 말로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막 집과 연결된 모든 것이 함께 무너집니다. 육신이 죽으면 육신과 연결된 세상의 모든 관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 권력, 가족, 교회 등의 모든 것이 함께 무너지고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어떻게 우리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영원한 집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손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집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 공간 어딘가에 천국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자비로 지어진 십자가의 세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 14:1-3절에서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마련된 거처는 우리의 신앙 능력이나 경건의 실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희생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거처는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로만 들어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죽음의 존재가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입게 되었음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고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 앞에서 인간의 형식과 공로에 가치를 두는 것은 무너져야 할 인간의 신앙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19-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은 보이는 성전에 주목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돈을 바꾸고 비둘기와 소를 팔게 했던 것도 성전에서 하나님께 번제와 희생을 드리기 위한 열성이었습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사하는 사람을 모두 내 쫓으십니다. 거룩한 성전에 장사꾼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전은 인간의 열성으로 유지되지 않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즉 성전은 십자가에서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전에서 하나님이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제사하고 희생 제물을 바친다 해도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이는 것에 주목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열성 또한 결국 예수님의 성취를 믿지 않는 인간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과 동일하게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 믿음을 여러분의 행실과 성품으로 확인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은혜를 상실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고후 5:7절을 보면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신자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면서 불안과 염려에 매몰되게 하는지 묵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계시로서의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에 주목하며 자기 열성을 담아 나타내고자 했던 모든 것이 은혜를 모독하는 인간의 불의였을 뿐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인간의 열성으로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우리가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이 이루어지게 하신 예수님의 공로에만 주목할 수 있도록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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