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1 15:29

(27강) 벗음과 입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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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5:2-4

고후 5:2-4http://onlycross.net/videos/co2/co2-05020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망의 존재인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신자로서 감사와 감격을 경험하고 누리며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라는 답을 명쾌하게 내어 놓지 못합니다. 감사와 감격을 경험하기는커녕 오히려 날마다 부딪히는 힘든 현실 속에서 불안과 염려만 경험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믿음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원론적인 믿음의 세게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의 현실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며 승리하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불안과 염려의 마음을 다스리며 낙심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 상태를 경험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믿음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기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승리, 믿음의 기쁨과 평안보다는 염려와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 마음 상태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 때문에나는 과연 믿음이 있고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가 맞는가?’라며 자신의 믿음에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삶으로 인한 염려와 불안이 믿음에 대한 불확실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대하는 믿음의 세계와 실제 살아가는 현실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자신에 대해 깊은 탄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십자가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감사와 기쁨과 감격으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믿음의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심적인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함께 하는 교회의 실상은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믿음의 실제가 아닌 헛된 환상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설교 또는 성경 공부 등을 통해서 수많은 단어들을 듣고 기억하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고난, 기쁨, 평안, 구원, 영광, 위로, 십자가, 낙심, 기도, 염려, 축복, 성령 등등의 단어들이 머리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단어들에 내포되어 있는 본질적인 의미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로 덮이면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해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 해석의 오류, 또는 왜곡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충만해지고 염려와 걱정은 사라지며 기쁨과 평안의 마음 상태가 되는 믿음의 현실을 원한다면 과연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믿는다고 하는 자신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믿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일까요?

 

 

누구나 불안과 염려로 가득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불행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현실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있다는 말도 합니다. 어떤 현실에서도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그러한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위로해 주신다고 말하지만 이 또한 실감되지 않는 말로 다가올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어려움입니다.

 

 

고후 1:4-6절을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런 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서로 조합하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신자가 고난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낙심하지 않고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기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난관은 환난과 고난이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께 받는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자영업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분들이 생활이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은 예수님일까요 돈일까요? 설령 신자라 할지라도 실감 있는 위로와 소망으로 다가오는 것은 돈이지 예수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구원이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 해결해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가 아닌 돈을 통해서 경험하고 누린다 해도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순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감사와 평강은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생존의 문제에서는 뜬구름 잡은 소리로 외면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대신 열심히 예수 믿어서 복 받고 기쁨과 평안의 삶을 누리며 그것으로 감사하는 현실적인 주제가 더 인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도 현실적인 주제라 할 수 없고 마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바울의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어려움과 고통과 고난의 형편에서도 지지 않고 굳건한 믿음의 마음으로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충만히 넘치는 그런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기대와는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복음의 세계라는 점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2-4)고 말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우리의 육신을 장막 집으로 비유하면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언급합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하면 천국을 상상하게 되는데 기독교인들에게 천국은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좋은 곳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즉 천국은 현재적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으로 소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는 말을 보면 바울은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처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현재의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죽고 몸이 흙으로 사라지기 전까지는 육신이 아닌 다른 몸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신에 다른 몸을 덧입기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생각 밖에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합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을 현실의 전부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집을 처소로 덧입고 사는 생소한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사람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바울의 이런 말에서도 역시 기쁨, 감사, 평강, 위로 등의 단어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고 산다면 육신의 문제로 인한 염려와 걱정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평강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서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처소를 덧입는다거나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는 말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덧입는다는 말을 합니다. 덧입는다는 것은 기존의 장막 집은 벗어 버리고 새로운 하늘의 처소로 교체한다는 뜻이 아니라 장막 위에 겹쳐 입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위에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가 겹쳐 입혀지기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되는 것을 바울이 사모하는 것입니다.

 

 

3:26,27절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옷 안에 존재하는 것은 기존의 인간입니다. 즉 장막 위에 그리스도가 옷 입혀져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 역시 단어에 대한 인간의 상상으로 조합하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결국 선함의 실천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선한 일에 대한 실천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신의 신자 됨에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의도가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전혀 다른 의도로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의도는 우리가 무너질 장막이 아닌 덧입혀진 처소, 옷 입혀진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었을 때 인간의 모든 것은 무너질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3:28-29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각기 다른 조건에서 존재합니다. 출신성별이 다르고 주어진 형편과 환경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차별을 야기합니다. 이러한 차별은 교회라 이름 하는 곳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파벌이나 여러 문제들, 바울을 비난했던 모든 것도 인위적이고 세상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서로를 차별했기에 나타나는 죄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로 함께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인위적이고 세상적인 어떤 조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만 의로운 것으로 인정되어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됨에 집중한다면 우리의 실천, 선함, 관습, 전통의 모든 것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입니다. 육신의 모든 것을 무너질 것으로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 주목하면서 이난의 손으로 짓지 않은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소로 덧입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바울은 벗은 몸으로 비유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선한 것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멋있는 자로 자신을 돋보이고 나타낸다 할지라도 모든 것은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막 집이 무너질 때 나를 치장하고 가리고 있던 모든 것도 무너지면서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탄식이 되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붙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온통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예배당도, 인간의 수준 높은 선한 행실도 장막 집이 무너지면서 사라질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의가 육신이 무너졌을 때도 우리를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로 옷 입은 것이 전부라면 결국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로 발견될 뿐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고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거룩한 성도로 발견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3:7-10절을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안다고 하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이 많은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된 것이 벌거벗었다는 자신들의 실상입니다. 이것을 두고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벌거벗고도 벌거벗은 것을 인식하지 않았던 예전의 시각이 아니라 벌거벗은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옳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삼아 자신을 가리는 시각이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이유도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행위를 옳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벗은 것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모습이 아니며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선과 악은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성이 신앙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고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작금의 교회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가릴 치마로 삼습니다.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멋있는 신앙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엮어 만든 치마를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오늘의 본문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구원 받은 신자라면’,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여 자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으로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답을 내리며 행함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행함이 없는 것을 신자답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이 밝아진 인간의 실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으로 불안감을 가지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목하고 집착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경험되고 감각되는 것으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행한 것의 여부와 무관하게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신의 손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가려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는 죽음의 존재인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된 자로 존재합니다. 비록 눈에 드러나는 현실은 육신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지만 실상은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되어 생명으로 나타나는 현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참된 현실로 받아들였기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었고 생명에 삼킨바 된 신비의 사건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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