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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6:3-10

고후 6:3-10http://onlycross.net/videos/co2/co2-060310.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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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설교>

신자는 하나님께 용서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를 믿으면 용서해 주시고 천국에 보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용서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전파할 영광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용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기중심의 시각으로 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용서로만 인식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인간성은 교회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그중의 하나가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과 관계로 타인을 대하고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고, 상대방의 행동이 내 기준에 옳은가 그른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드러내는 모습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일 것입니다.

 

 

이 문제의 답은신자는 타인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판단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판단이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라는 교훈적인 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훈적인 가르침이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그동안의 교회 생활을 통하여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우리가미워하면 안 된다, 판단하면 안 된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미워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까? 알지만 우리의 의지로는 실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답일까요? 이것을 고린도 교회로부터 비난과 판단을 받았던 바울의 말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3,4절에서 바울은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직분, 또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을 단순히 전도와 봉사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도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면 세상으로부터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인데 교회나 기독교인이 세상의 비방을 받는 일을 하게 되면 전도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도를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의미와도 전혀 다릅니다. 비성경적인 인간의 발상일 뿐입니다. 전도의 주체나 결과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를 배제한 채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앞세우고 인간이 추구하는 효과적인 결과를 얻는 전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인간관계가 중요한 것처럼 오인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에 있어서 인간의 말과 모든 지혜를 부정합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말을 잘해야 하는 것도, 세상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럼 세상과의 관계가 나쁘고 비방을 받아도 된다는 것인가?’라는 뜻으로 받지 마십시오.

 

 

설령 제가비방을 받아도 됩니다라고 말한다 해도 고의로 비방 받는 행동을 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가치와 유익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든 세상 관계든 관심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비방의 문제가 세상과의 관계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4-10절까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에는 세상과의 관계 문제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예 바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라는 직분은 세상과 좋은 관계로 인해 도움을 받거나 나쁜 관계가 되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길에는 환난과 궁핍과 고난 등의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서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6-8)고 말합니다. 이것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살았던 바울의 인생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비방 받는 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사도라는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둘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비방을 받으면 바울의 사도라는 직분도 함께 비방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이 인간관계에서 뛰어난 처세술을 보여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으면 사도 직분도 영광스럽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으로는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치 미술관에서 전시된 그림을 구경하고잘 그렸다는 감탄과 함께 돌아서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바울의 글에서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이다라는 평가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거리낀다는 것은 방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걸림돌, 장애물을 의미하는 것인데 바울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사도의 직분이 비방 받는 일이 없게 하려고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의 어려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믿음이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비방을 받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독교인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인해 비방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비방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자처한 인간이 비방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결과로 기대하는 것은 보상입니다. 보상, 즉 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교회도 약속이나 한 듯 이구동성으로 믿음에는 보상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보상은커녕 바울처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하는 고통과 고난만 주어진다면 본인이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나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낙심과 의심, 또는믿어도 별수 없네라는 조롱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바울의 사도라는 직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보상이 있다는 시각에서 보게 되면 바울이 겪는 모든 일은 바울이 사도로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사도라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며 당연히 복을 주셔야 하는데 인간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여러 가지의 고난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고후 5:18-19절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을 화목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도의 직분을 단지 복음을 전하는 전도, 선교가 아닌 화목의 의미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화목하게 하는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사도로서 비방과 욕을 먹지 않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화목은 좋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에게 사도라는 직분은 어떤 조건과 형편에서라도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러한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도라는 것 때문에 세상의 가치 있는 것으로 보상받는 직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였던 자신을 부르심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직분을 허락하신 것만으로도 넘치는 영광이고 기쁨이며 보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사도의 직분임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직분에 대해 비방할 때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사도의 직분을 받았으면서도 그리스도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비방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고 거리끼지 않게 하려고 그리스도로 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4-10절까지의 내용은 그런 의미로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바울의 사도직을 비방하는 무리에 대한 책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 대한 비방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말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잘하지 못하고 육체에 병이 있다는 것 등을 문제 삼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음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께 초점을 두지 않는다는 증거는 타인의 행동과 말의 잘잘못을 따지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드러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하는 복음으로 기뻐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것으로 부요해지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것이 비방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세습, 재정문제, 목사의 성 추문, 그런 것으로 교회를 평가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분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현대 교회는 교회에 대한 인식 자체부터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믿음의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복음에 초점을 두고 있는지의 여부는 무시된 채 외적인 활동이나 도덕적 기준으로 교회가 평가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이 칭찬하는 교회는 바른 교회라는 평가만 존재하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기독교 본질인 모든 것이 실종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생명, 죄 등의 모든 것이 실종된 채 인간이 모여 꾸려가는 종교 단체로만 유지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서로가 우리 교회는 말씀 중심으로 살려고 힘쓰는 바른 교회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에서 봉사의 일을 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먼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어 열심히 선교하는 것이 교회다운 바른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러한 일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교회를 평가하고 비방하게 되는 기준이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준은 그리스도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비방하게 된 것도 기준이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굳건한 기준과 중심으로 자리했다면 바울에게서 살필 것은 복음 하나면 됩니다. 자신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지의 여부가 사도를 사도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재주나 삶의 형편, 인간성 등은 사도라는 직분에서는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에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시선을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에게 두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야 합니다. 시선을 인간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외적 조건이나 행실에 대해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게, 복음에 시선을 둔다면 다른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함께 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복음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교회 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직분은 그 사람의 실력이나 인간 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신자가 성격이 왜 저래?’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신자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신자라는 직분이 비방을 받게 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룩하게 된 신자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종교는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행실을 따져서 상과 벌을 주는 신의 세계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 열심히 신을 섬기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정석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 세계에서 기독교도 생각을 같이하면서 믿음의 결과를 복으로 인한 보상에 두고 있다면 그것이 비방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가 성경을 덮고 복음이 실종된 상태에 있다면 그러한 비방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아닌 윤리와 도덕에 의한 비방이 앞서는 것입니다.

 

 

사도의 직분이 화목하게 하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악함을 판단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죄 가운데 있는 악한 인간을 심판의 대상이 아닌 은혜의 대상으로 다루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악함을 판단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그리스도의 은혜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리스도만 증거함으로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기준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바울을 비방하는 일을 두고 책망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받았고, 그 말씀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라는 직분을 받은 자로 교회에 반응하는 것이지 바울이라는 한 인간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직분의 의미를 아는 사도로서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바울의 뜻입니다.

 

 

이제 신자라고 하는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 부르심으로 거룩하게 된 신자로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며 은혜를 받은 자로 은혜를 증거 할 직분자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신자라는 직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인간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은 자로 반응해야 합니다. 함께 십자가의 피로 죄가 용서된 자로 서로에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세상적인 판단과 싸움이 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서로를 판단하는 우리가 신자 됨에 비방을 받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열심히 봉사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줄 알았던 것이 오히려 신자 됨에 비방을 받게 하는 걸림돌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신자 됨은 안 개인의 도덕적 우월성이나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삶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인생에서의 답은 또다시 그리스도로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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