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깨끗하게 하자

by 신윤식 posted Jul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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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6:16-7:1

고후 6:16-7:1http://onlycross.net/videos/co2/co2-06160701.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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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설교>

성경을 기독교인으로서의 덕목을 갖추는 데 필요한 교훈을 가르치는 종교의 경전처럼 생각한다면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있을지언정 성경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는 느낌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을 생각하면 성경이 우리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크나큰 장벽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어긋나는 듯한 내용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서로 어긋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강동하심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저 하나님이 하신 좋은 말씀이라는 생각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고 신비한 말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주의 깊게 본다면 사방에 지뢰가 깔린 것처럼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막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서로 어긋나는 것 같은 내용으로 가득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내용도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1절을 보면 바울은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말을 우리에게 이미 학습되어있는 지식을 따라 해석한다면 막힐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죄를 피하고 범하지 않으며 선한 행동을 하면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성경이 인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를 간과한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인간이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 수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 수 있음을 전제했을 때 거룩한 행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롬 7:18-19절을 보면 바울이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없고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자기 의지와 행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바울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는 거룩함을 이루어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면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않고 깨끗하게 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죄가 있습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지만 죄를 극복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심지어는 죄를 분간할 능력도 없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1)는 말을 합니다. 바울 자신도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현실에 있으면서도 악에게 지지 말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몇 가지의 경우만 예로 들어도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같은 성경에서도 서로 어긋나고 부딪히는 듯한 내용이 성경 해석에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경이 크나큰 장벽으로 느껴짐을 경험하면서 성령의 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 말씀의 세계임을 자각하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적어도 성경을 깊은 생각 없이 읽고 지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후 6:17-18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것은 구약적 용어입니다. 구약에는 부정한 것으로 구별된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민 19:16절의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라는 말에서는 시체나 사람의 뼈, 무덤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만지지 말라 합니다. 만약 만지면 만진 자도 이레 동안 부정해진다는 규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약 시대라고 하는 지금에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것이 없습니다. 시체, 사람의 뼈, 무덤을 만진다 해도 부정하게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독교가 우상이라고 하는 부처상을 만진다 해도 그 때문에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만지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은 있을지언정 부처상이 우리를 부정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무엇을 만진다 해서 부정해지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말 또한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심지어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는 말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는 자에게 해당합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현대 사회에서 바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초점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레 6:27 절의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기는 속죄제 제물입니다. 속죄제 제물에 접촉하는 자, 만지는 모든 자가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거룩한 것을 만지라는 말이 신자의 거룩을 위해 더 적극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속죄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것을 만져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없고 부정한 것을 만져서 부정하게 되는 것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말은무엇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신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즉 바울은 신자가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누구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말로 신자는 거룩한 자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마치 신자가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거나 거룩하게 되기 위해 만지지 말아야 할 부정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에게 거룩은 완성일까요? 미완성일까요? 1:21-22절의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하게 하셨고 거룩함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존재이고 그리스도 안은 십자가의 피로 거룩함이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온전히 거룩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으로 이루어야 할 거룩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사건이라는 뜻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더러운 것으로 간주 되는 것입니다.

 

 

2:5-7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이루어진 완성된 사건을 뜻합니다. 그런데도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는 말처럼하라라는 말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거룩의 완성을 말하면서도 거룩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완성에 초점을 두면 우리가 신자로 살아가면서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완성이라는 말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고자 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를 거룩의 완성의 세계로 부르시고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여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9:14절에서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때문에 이미 깨끗함을 입은 신자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이 없고, 또 깨끗하게 한다 해도 우리의 힘으로는 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입은 신자가 모든 것이 은혜로 되어졌음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 높여지고 자랑 되는 깨끗함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자신이 어떻게 거룩함을 입게 되었는지 모든 내막을 알게 된 것이 신자라면 신자는 자신을 거룩한 자 되게 한 주의 공로에만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주의 공로에만 초점을 둔다는 증거는 인간이 공로로 여기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깨끗함을 근거를 도무지 자신에게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가령 은혜를 말할 때하나님께 은혜받았으니 은혜받은 신자답게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었으니 거룩한 삶을 살자라는 것이 자신에게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더러운 자를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고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라는 말을 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높이고 예수님의 존귀함을 자랑하는 자로 세우기 위해 베풀어지는 것인데 오히려 은혜받았다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안다고 쉽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신자가 어떻게 발생하고 존재하게 되는가?’에 대해 계속 묻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라고 말합니다. 약속을 가진 자가 신자라면 약속을 가지지 않은 자는 불신자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약속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의 다른 점이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다른 점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쉽게 말하면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을 가진 신자는 그 속에 주의 피가 공로로 자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구원과 심판을 판단해야 할까요? 당연히 주의 피의 공로입니다. 약속을 가지지 않은 자가 자신의 공로와 선함에 초점을 두고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기 위해 힘쓸 때 약속을 가진 자는 주의 공로에만 마음을 두고 십자가의 피의 은혜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말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행함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예수와 상관없이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며 복과 구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할 인간으로 넘칠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을 가지지 않은 세상의 저주 받은 실상입니다.

 

 

고후 6:16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두루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가득합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자비로 가득한 것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 상태만으로 성전은 거룩하고 깨끗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신자의 거룩과 깨끗함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닌 다른 것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주의 공로가 아닌 다른 것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공로와 선함으로 거룩과 깨끗함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우리의 의가 되어 죽음의 존재를 생명에 있게 한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 높이는 것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비난한 것으로 드러난 참된 잘못은비난했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공로가 아닌 다른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것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만진다면 이유는 부정한 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로보다 우리의 공로에 마음이 끌립니다. 주님의 공로를 높이는 것보다 나의 공로가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오늘도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이 주의 공로만 높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