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1 16:22

(43강)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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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7:2-4

고후 7:2-4http://onlycross.net/videos/co2/co2-070204.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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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설교>

교회를 가리켜성령 공동체’‘종말론적 공동체’‘언약 공동체’‘말씀 공동체등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사실 성경에 공동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없는 용어니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체를 단체나 조직이 아닌 관계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교회는 얼마든지 공동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나 이념, 목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조직체로서의 의미로 공동체를 이해한다면 교회에 적용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공동체로 말할 때는 반드시 성경적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무엇인지부터 바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시되거나 생략된 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동체를 교회에 적용하게 되면 교회는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이 함께하는 종교단체로 인식될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는 말이 마치 고린도 교회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공동체라는 말을 이처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관계로 잘못 인식하여 아예 집단으로 함께 거주하며 생활하는 기독교 공동체 단체가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를 가리켜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록 뜻을 같이하고 생사고락을 함께할 끈끈한 인간관계로 뭉친 공동체라 할지라도 분쟁과 파당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벗을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어떤 이름의 공동체로 부른다 해도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인간이 함께하는 사회에서 드러나는 온갖 불의하고 더러운 모습들을 똑같이 목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의미의 공동체로 이해해야 할까요? 단순히 같은 교회에 속한 교인이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관계이기 때문에 공동체라 한다면 과연 이런 관계를 성경이 인정하는지부터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를 지칭합니다. 이러한 교회를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를 공동체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공동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거룩한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심각한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고 공동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고 예수를 본받을 것을 강조하는 교회 공동체에 세상과 다르지 않은 분쟁과 파당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또한 이러한 교회를 향해서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한다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러한 교회의 현실적 문제 때문에 신학자들 가운데는보이는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교회는 되어가고 지어져 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6:16절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합니다. 물론 예배당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교회로 함께 하면서 많은 문제를 경험하게 되면교회가 왜 이래라며 크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없는 좀 더 좋은 교회를 찾아 옮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고린도 교회 또한 이러한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고, 분쟁은 서로를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는 고린도에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까지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교회에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함께 죽고 함께 살고라는 관계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

 

 

함께라는 말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습니다. 너와 나로 구별하면서우리 함께 하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속을 감추고 있는 위선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관계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관계에 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성령 공동체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 된 관계로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인 것입니다.

 

 

6:8-9절을 보면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로 말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함께하는 것이 교회라면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관계로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은 사도처럼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갈 2:19-20절에서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은 죽고 사는 문제를 육신의 문제가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해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주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이 육신으로 느끼고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개그저 그런가 보다라는 반응으로 일관합니다. 관심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성령 공동체라면 결코 소홀히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죽고 사는 관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교회를 안다고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함께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심각성은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과 파당을 포함해서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고 사는 관계에 있는 교회 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종교단체로 전락하는 이유입니다.

 

 

6:4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대개는 이것을 성화의 차원으로 받아들입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며,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을 새 생명을 얻은 신자다운 삶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의 현실에서 늘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이 도무지 우리가 상상하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육신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는 인간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문제가 자신의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육신을 근거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육신의 실천으로 이해하는 성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또한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은 자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살아난 관계로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함께라는 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모든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잘한다 못한다로 나누어 구별하고 차별할 수 없이 죄가 같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 또한 같습니다. 이것이 함께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공동체로 말하고자 한다면 반드시함께라는 말에 담긴 개념부터 바르게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세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개인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수단으로 제공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새로운 피조물로 함께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이러한함께의 관계에는너는 나와 다르다는 것이 없습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같이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인데도 불구하고 이 의미를 간과한 채 너무 안일하게 십자가를 말하기 때문에 개인 구원을 위한 십자가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신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가 함께 죽고 사는 세계로서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라면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곧 자신이라는 것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려는 것이 이유입니다. 죄를 지적함으로써 서로가 죄로 인해 죽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음을 믿는 믿음으로 함께 하는 하나 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 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4절의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사도의 입장이었다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인해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비난까지 한 것은 인간관계에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교회를 신뢰하고 자랑한다고 하면서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합니다. 이러한 바울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도무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가 아니라 분쟁과 시기와 함께 파벌로 시끄러웠습니다. 온통 교회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하는 문제들로 가득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위로와 기쁨을 넘치게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우리의 평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간과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잘못됨입니다.

 

 

여러분은 서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은석교회를 자랑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먼저 자랑할 수 있는 업적이 있는지를 살필 것입니다. 자랑거리가 될만한 일이 있어야 자랑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 자랑하는가?’라는 생각으로 드러나는 잘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우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는 잘못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는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교회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비난받아야 할 일을 하지 않아야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증거 하는 십자가가 있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성령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게 장악되어 자신의 의가 아닌 죄를 깨달으며 오직 죽음의 존재일 뿐이라는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을 함께 하는 관계로 함께 하는 것을 교회라 하는 것입니다.

 

 

고후 7:6-7절을 보면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다는 것을 보면 디도를 통해서 듣게 된 교회의 소식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던 같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교회가 회개를 하고 바울을 사모하며 애통하였다는 소식이 사도에게 위로와 기쁨이 된 것입니다. 교회가 바울을 비난하던 것을 멈추고 바울을 신실한 사도로 인정했다 해도 그것으로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십자가에 함께 하게 된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십자가가 있을 때 십자가로 말미암아 누리는 위로와 기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자랑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업적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용서되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한다는 믿음이면 충분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저의 설명이 복잡하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교회 됨을 몰라도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면 바울은 괜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괜한 말이 됩니다.‘성경이 없어도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의 기독교인을 보면 성경에는 관심이 없이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것에 길들어져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성경은 몰라도 많이만 읽으면 예수를 잘 믿는 신앙으로 인정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십자가 믿음으로 함께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있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모임으로 흡족해하는 종교단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행하심 아래 하나 된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이함께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우리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교회로 함께 한다면 우리가 서로 나누면서 위로받을 것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주의 은혜로 인한 위로와 기쁨을 서로에게 나누기 위해 함께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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