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명령이 아닌 증명

by 신윤식 posted Aug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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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8:7-9

고후 8:7-9http://onlycross.net/videos/co2/co2-080709.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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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성경과 신앙에 대한 왜곡은 기독교인들에게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 충성, 봉사, 헌신을 강요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성경에 충성, 봉사, 헌신이라는 단어와 내용이 등장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순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강요가 없고 하나님 자기 백성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령이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강제적인 요구, 즉 강요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거부할 수 없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강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순종을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지난 주일에성경에는 우리가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 순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 봉사, 헌신을 명령하시거나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여러분이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내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는 십계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십계명은하라하지 말라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기독교인은 십계명을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어느 것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인간 됨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잘 다닌다는 것으로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십계명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명령들을 잘 지킨다고 생각합니까?

 

 

명령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바울이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8)라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전 7:6절에서도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닌데 명령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마게도냐 교회의 풍성한 연보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6,7)라는 말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고린도 교회 입장이라면 어떻게 들었을까요?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요청을 받았으나 자신들의 형편이 좋지 않아 연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서 하였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바울의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리겠습니까? 형편을 이유로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부끄럽게 하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요? 그리고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는 말은말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말고 연보를 해서 은혜에 풍성하게 하라며 사도가 명령하는 것으로 듣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바울은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명령으로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연보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연보를 하게 해서 가능하면 많은 액수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었다면 자신의 말을 명령으로 받으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헌금에 대한 한국교회의 문제는 헌금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헌금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앞세워 헌금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간혹 어떤 교회는우리 교회는 헌금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으로 교회가 성경적이고 바르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그것도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헌금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정당함이 된다면 바울은 교회에 연보를 요청하지도, 연보에 대한 말도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당당하고도 떳떳하게 연보에 대한 말을 합니다. 연보 또한 복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돈을 바치는 연보와 다르다는 것은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연보는 돈이 아니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폐단 중의 하나는 헌금이 돈이야기가 되고 돈을 요구하는 거짓 명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헌금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에 대한 설교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다만 돈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헌금, 즉 연보의 의미가 아닙니다. 헌금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연보에 대한 말을 하면서 명령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는 이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명령의 의미였다면 고린도 교회가 뒤늦게라도 연보에 참여하는 것으로 바울의 말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마게도냐 교회처럼 풍성한 연보이거나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서 했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이 아니라 사도의 말 때문에 할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강요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의 헌금도 강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49-50절에 보면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곧 영생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말씀을 떠나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음에 이른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이라는 것은 명령을 지켜서 영생을 얻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명령을 예수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의 모든 명령을 지켜 이루셨음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곧 우리에게 의가 되고 영생이라는 뜻이 됩니다. 십계명도 우리가 지켜서 영생을 얻을 명령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십계명의 모든 명령을 지켜 이루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이 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이 명령을 지키는 참된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손수 지켜 행하고 실천해야 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왜곡하여 이해하는 잘못됨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는 것은말씀을 지키고 순종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19:20-21절에 보면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그것이 영생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를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제시한 명령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청년은 예수님의 명령 앞에서 근심하고 돌아갑니다. 소유를 자신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청년은 소유에 가치를 두고 있는 자신은 영생을 얻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영생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예수님 앞에 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이 되는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실천을 묻는 것이 부자 청년과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9)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부요하신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부요한 자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극심히 가난했던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는 가난한 자의 눈물겨운 연보가 아니라 부요한 신자의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연보는 연보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부요한 자임을 나타내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에 연보를 하는 것으로 나는 부요한 자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또 다른 의도로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연보를 해야 부요한 자임을 보여주는 증명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유의 가치를 두고 자신을 판단하는 세상의 기준과 관점에서 나와야 함을 말합니다. 극심한 가난에서도나는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으로 하늘의 영생에 속한 부요한 자다는 은혜가 연보로 나타나는 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가난하게 되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나는 형편이 좋지 못해서 연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 기준과 관점에 붙들려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 말을결국 연보를 하라는 것인가?’라는 의미로 듣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은너희는 그리스도로 부요하게 된 자다. 그 부요함을 연보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연보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연보로 너희 사랑의 진실함을 확인하려고 한다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너희는 소유와 형편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요한 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형편이라는 것에 매이지 말고 부요한 자로 자유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요하게 된 지체로 함께 합니다. 덜 부요하거나 더 부요한 차이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부요하게 된 부요는 모두에게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의 연보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부요한 신자의 연보는 액수가 아닌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러한 연보를 돈으로 바꿔버리고 많고 적음으로 믿음과 은혜받음의 여부를 저울질하는 것으로 변질시킨 것이 지금의 교회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명령으로 받는 것을 경계합니다. 명령으로 받으면 은혜의 연보가 행함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남으면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의 행함을 높이게 되지만 행함으로 남으면 인간의 행함이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게 되는 것이니다. 이것은 연보의 문제만이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고 실천해야 할 명령으로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5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돈, 즉 소유가 행복을 위한 필요 가치로 인정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만 돈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가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말씀에 얼마나 실감할 수 있을까요? 영생의 문제만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고 아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있어야 대접받는 세상에서탐심을 물리치라는 말씀은 우리를 무기력한 자로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스도가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살면서 지금의 형편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부요해진 것을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요? 물론 성령이 도우셔야 합니다. 하지만 소유의 넉넉함에 마음을 두고 살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부요한 신자 됨을 누리고자 한다면 소유가 아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인한 풍요로운 인생, 그리스도로 부요한 인생의 넉넉함을 날마다 바라고 찾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세상은 종말이라는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세상의 참된 현실입니다. 심판에서의 구원은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소유가 넉넉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것 때문에 부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부요는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소유의 의미 없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자신의 형편을 따지며 연보에 참여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에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 이야기를 하면서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 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