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5.13 16:58

(2강) 견고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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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설교>

복음에 대한 사전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고 있는 복음에 대한 상식적인 내용일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이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은 받아들이고 거부할 사람은 거부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시각에서의 기독교인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구원자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스스로 예수를 구원자로 선택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진리로서의 기독교인지 아니면 종교로서의 기독교인지로 구분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진리로서의 기독교는 ‘예수님이 나를 선택하여 찾아오셔서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가 믿음의 내용으로 자리하고 있는 반면,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내가 예수를 선택하여 구원자로 믿는다’가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절의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교회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자신의 뜻과 공로와 모든 행함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가운데서의 부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로서의 기독교가 표방하고 추구해야 할 믿음의 내용이기에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현대 기독교를 진단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만 가능하다면 하나님에게는 애당초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신에 대한 인간의 사고와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사고는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세상의 사고와 일치되는 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왜 그들이 예수를 믿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내세우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고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택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구원자로 믿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에 합리적일 뿐이지 인간 중심으로 왜곡된 비성경적 주장입니다.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후에 인간의 행함 여부에 따라 구원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8절에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자의 구원은 견고합니다.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문제로 가득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에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문제에 대해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문제로 인해 분란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지금의 우리 시각에서 본다면 가히 교회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죄를 묵인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여러 문제가 있다 해도 구원은 견고하니까 흔들리지 말라고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일까요?

 

 

사실 여러 문제로 인해서 교회의 교회 됨이 흔들린다고 할 수 있는 교회를 향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는 것은 의문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형편에서는 이 말이 어울린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고린도 교회의 안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안정되어 평안한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교회답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 있는 사람이 함께 하는 교회일 때 당연히 문제는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그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무엇을 믿는가?’라는 자신을 향한 물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편지도 “당신들이 믿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미로 들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도 구원이 견고하다면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다면 고린도 교회의 구원의 여부는 분명 흔들리거나 의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신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조건을 기준으로 원하신 자를 택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조건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공평하지 않다’는 반발에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조건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기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모든 사람이 기도하기에 동일한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건강이 좋지 않아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다면 그는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하지 못해 구원에서 탈락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구원을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야 말로 공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즉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는 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행하신 일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어 우리를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구원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나에게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서, 인간에게서 나와지는 그 어떤 행함에 대해서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 십자가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 됩니다.

 

 

인간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행함을 믿음의 증거로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일 것입니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증거는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모순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면 믿음은 처음부터 인간의 행함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증거 되는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 스스로 열매를 맺고 증거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의 행함을 보게 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 믿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이며 그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할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습니까?’라는 물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해 자각하게 함으로써 믿음 또한 자신의 의지와 공로가 아님을 믿으며 온전히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 자로 세우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는 것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은혜를 주셨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주어진 은혜라면 그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나도 세상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예수 안에서 그러한 은혜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안은 예수님이 다 이루신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이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혜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는 동일합니다.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다 이루신 예수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며, 예수 안에 있는 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예수 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나타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다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서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용서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했다 못했다는 것이 전혀 의미 없는 세계가 곧 예수 안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복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에게 예수 안에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알지 못함으로 인간이나 그 행위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것이 여러 문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령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의 문제로 파벌이 발생하였는데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든 그것이 신자의 가치가 되지 못하고 하등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파벌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우리의 행함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럴 때 누구의 문제나 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문제이고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참으로 복되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예수 안에 있게 하신 고린도 교회 자신들이야 말로 은혜이며 감사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든 어떤 은사를 받았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그것만으로 이미 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5-7절의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는 말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은사가 많았습니다. 언변과 지식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은사 때문에 차별이 유발된 것입니다. 바울은 언변과 모든 지식의 풍족을 그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문제로 말합니다. 즉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은사를 받은 사람의 실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이유는 고린도 교회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에는 부족함이 없으면 다른 은사와 비교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부족함이 없는 완성의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행함과 실천이 있다 해도 그것이 특별한 가치가 되어 우리의 믿음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것을 오해하고 있었기에 ‘너희는 무엇을 믿느냐?’라는 취지로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와 있는 것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거룩한 백성이 된 것도, 어느 것 하나 우리의 힘과는 무관합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면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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