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6 19:00

(54강) 봉사의 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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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후 9:10-15

고후 9:10-15http://onlycross.net/videos/co2/co2-091015.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3.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설교>

바울이 세상의 모든 일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쓴 서신의 중심도 항상 십자가이고 연보에 대해 말하는 내용 또한 십자가 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보를 신앙 행위의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바울도 우리처럼 연보를 신앙 행위로 간주한다면 바울의 십자가 신앙은 행함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행함을 불가분의 관계라고 하고, 행함은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은 행함의 내용이라고 하는 현대 교회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갈 2:16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이지만 믿음의 증거, 열매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야고보서의 내용대로 행위로 믿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 행위에 대한 현대 교회의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 속에서 연보 또한 믿음의 증거, 믿음의 표현이란 명목과 함께 중요한 행위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경계했던 무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진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행함에 대한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을 주장한다고 해서 구약 시대처럼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제물을 잡아 바치며 제사하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2장에서 할례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할례가 문제 되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마 지금의 교회에서 할례를 받아야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면 거의 이단처럼 취급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십일조, 연보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십일조, 연보는 율법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것일까요?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과 무관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연보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로 인식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역시 구약의 제사 행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인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구제를 위한 연보 또한 믿음의 행위로 인식됩니다. 십일조 연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7-9)라는 심각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준은 십자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맞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어 거룩한 성도로 여김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바울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십자가를 기준으로 바라보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십자가와 실제의 삶이 다른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율법으로 돌아가 율법의 길을 가면서도 본인은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믿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본문에서 십자가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십자가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바울이기에 본문에도 십자가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13절의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라는 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급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연보가 그리스도의 복음, 즉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연보라는 행위가 아닌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보면서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연보는 신자가 담당해야 할 봉사의 직무고 이 직무에 충실한 것이 십자가 신앙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십자가 신앙으로 나아가는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선뜻아니다라고 말하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연보는 여전히 선한 믿음의 행위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복음과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믿음의 증거이자 열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신앙 행위 안에서 구원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으로 지적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3:3).

 

 

그러면 바울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연보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연보가 참된 연보로 드러나려면 그 시작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 참된 연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보 하는 신자가 주지해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비록 자신이 연보를 하지만 그 시작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실되면 연보의 시작을 자신에게 두면서 결국 자기의 행위로 간주하고 영광도 자기 것으로 챙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연보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신앙의 행위로 보는 반면 바울은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십자가 복음으로 보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는 자는 심을 것을 자신이 준비하여 심기 때문에 거두는 양식도 자기 것입니다. 그러면 심을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면 거두는 것은 누구의 것일까요?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두는 양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치는 것으로 보는 바울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연보의 시작도 하나님께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보가 하나님으로 시작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연보를 하지 못할 형편이라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라는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항상 부족함이 없이 넘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처한 현재의 형편에 매임으로 인해서 형편에 따라 연보 하는 것을 지극히 타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시작을 하나님이 자신 자신에게 두는 것이고 연보를 은혜가 아닌 돈을 바치는 행위로 바라보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연보에 대한 이해가 거의 이러한 시각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바울과 우리의 다른 점입니다.

 

 

연보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면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에 대한 바울의 생각입니다. 자신들의 형편 때문에 연보를 못 한다는 것이 심는 자에게 심을 것을 주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으시고 모든 일에 넉넉하여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말하고 믿는다면서도 어려운 형편 때문에 연보를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자신의 고백과 믿음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연보의 시작을 사람에게 둠으로써 나타나는 폐단은 다양합니다. 그중의 하나는 연보를 한 사람이 연보를 받은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하면 된다고 할 것이고 연보 하는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노골적인 표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무엇이 자신의 믿음을 멋있는 것으로 포장하여 드러내는 방법인가를 아는 자의 위선일 수도 있다는 것에 가능성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도 보면 어려운 교회를 돕는 연보를 많이 합니다. 소위 대형교회로 불리는 교회는 선교사와 어려운 교회, 사회사업을 하는 단체를 많이 후원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교회의 업적과 의로 자랑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연보를 받는 교회의 목사는 연보를 주는 교회 목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보는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 신앙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한 가운데서 해석하는 것이 연보를 포함해서 신앙생활로 여기는 활동들이 종교적 업적을 쌓는 기회로 오용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보를 하든 무엇을 하든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시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마치는 것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치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연보에 대한 시각으로 자리한다면 우리가 하는 연보는 모두 허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연보는 기껏 돈을 내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죄인인 우리에게 대속물로 주시는 연보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된 연보의 당사자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무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12-14절에서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봉사의 직무를 성도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형편이 어려운 교회이기 때문에 돈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해석하면 봉사의 직무는 부족한 돈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되고, 연보의 목적과 의미 역시 돈이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봉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봉사도 어려운 이웃의 부족한 돈을 채워주는 것에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돈에 대해서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형편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에게 지속하는 욕망입니다. 따라서 연보가 어려운 성도의 부족한 돈을 보충해 주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그것을 봉사의 직무로 여긴다면 결국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보충하는 봉사의 의미로 전락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는 것을 쉽게 돈을 보충해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부족함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고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하시는 분이지만 실제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든 일에 모든 것에 대한 부족함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는 신자라면 누구나 믿음의 부족함을 절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의 능력으로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넘치는 은혜이며 부요입니다. 이러한 부요의 나타남이 돈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보는 돈과 형편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에 함께 하는 신자의 사귐입니다.

 

 

돈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의 부족을 보충해 준다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돈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 해도 일시적이며 미미한 것이며 연보를 받은 처지에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해도 역시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부족을 절감하는 신자에게 진정한 보충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이 부족한 우리에게 참된 보충이 되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로 생명에 속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보는 세상처럼 자기 형편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로 부요한 넉넉함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두고 봉사의 직무로 말하는 것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우리는 자기 소유가 없는 처지입니다. 연보를 하는 자나 연보를 받는 자가 같은 처지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는 연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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