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6.03 16:17

(5강) 십자가와 분쟁

조회 수 281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전 1:10-17http://onlycross.net/videos/co1/co1-01101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설교>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교회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촉구하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 말에 대해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않는다기보다는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며 현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초대교회를 교회의 시작으로 보면서 그때의 신앙이 거의 완벽할 정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 초대교회라고 인식하기에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에 반대도 거부도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먹었던 이야기는 교회의 교회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아주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대교회를 지금의 교회가 본받고 실천하여 닮아가야 할 교회다움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초대교회가 오늘의 우리가 본받고 닮아가며 이루어야 할 이상적인 교회다운 교회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언급되는 초대교회는 신앙적인 모습 외에도 인간의 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정적인 모습 또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 교회 또한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해서 바울의 복음 전파로 인해 세워진 여러 지역의 교회들 또한 인간이 함께 하는 것 때문에 발생하고 겪을 수밖에 없는 분쟁과 갈등과 다툼, 혼란이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교회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진 것 때문에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던 것도 초대 교회들 또한 단지 인간이었을 뿐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신앙의 덕목으로 열심히 가르치는 사랑, 이해, 용납, 용서가 사라지고 혈연이나 지연을 앞세우는 현대 사회의 문제가 초대교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라고 해서 우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이었기에 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드러내었던 문제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 언급되는 분쟁과 분열, 파벌입니다.

 

 

1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지만, 사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나와 너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인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는 말입니다.

 

 

바울이 들었던 고린도 교회의 좋지 않은 소식 중 하나가 분쟁입니다. 12절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져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한 교회에 4개의 파벌이 존재한다면 교인의 숫자가 아주 많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짐작 건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는 복음이 융성할 수 없는 이방지역인데다가 그리스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벌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절)라고 말한 것을 보면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지를 따졌던 것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지를 따졌다면 그리스도파가 등장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파라는 것이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아예 파벌이라는 것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보다 나은 이는 없기에 그리스도에게 직접 세례를 받은 사람 앞에 굴복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파는 바울을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마 바울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기에 바울을 추종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아볼로를 추종했을 수 있고,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수제자로 인정받았던 베드로를 추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파는 이처럼 인간을 따르는 것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권위를 두고 그리스도만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리스도파는 옳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의 권위는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권위만 인정하겠다는 것이야 말로 바른 믿음이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라 해도 자신들을 그리스도파로 여겼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신들처럼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만의 그리스도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권위만 인정하는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가치와 권위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잘못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든 동일합니다. 바울에게 세례를 받아도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아도 하나님의 긍휼로 죄가 용서됨으로써 죄의 값인 죽음에서 해방되었기에 모두가 죄인으로 함께 할 뿐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십자가에 대해 얘기합니다.

 

 

바울이 분쟁과 파벌이 있는 교회를 향해 십자가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들었고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십자가를 알고 믿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이 십자가에 대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29절에서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교회의 분쟁과 파벌을 육체를 자랑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거하지 못하는 실패의 모습이기에 십자가가 무엇인지에 대해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또한 항상 십자가에 대해 실패하는 자로 살아가기에 ‘나는 십자가를 잘 안다. 듣지 않아도 된다’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잘 안다는 것이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십자가에 거하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의 실패와 동일한 것이 됩니다.

 

 

십자가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알지 못하고서는 십자가에 담긴 생명의 비밀을 알 수 없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누구든 십자가를 믿는다면 죽은 자로 주 앞에 나와져야 합니다. 그렇게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알게 되었을 때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안겨준 생명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를 아는 나 또한 거룩해진다거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려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분으로 존재하게 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참된 의미는 자기 포기이고 자기 부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된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를 말하나 십자가에 대해 실패한 것으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이유를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볼로와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 이유는 세례를 베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물론이고 세례를 베풀었던 아볼로나 베드로가 세례를 베푼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을 추종할 것을 선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자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서로에 대해 경쟁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을 추종하는 각자의 무리들이 발생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는 신자들이 사람에게 차이를 두고 대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내셨고 보내신 이유는 자신들에게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놓친 것입니다. 이것이 파벌과 분쟁의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13절). 이 말은 자신을 추종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고, 자신을 추종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4-16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누군가에게 세례 주는 것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주는 일이 사도에게 중요했다면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무는 동안에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 집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례 베푸는 것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교회는 세례 베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례 받는 것을 구원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진짜 신자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목사들 가운데는 군대에서 한꺼번에 수 천 명에게 세례 주는 일에 참석한 것을 마치 위대한 업적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세례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례가 필요 없는 것이라면 비록 소수라 해도 바울이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처럼 세례가 남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각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놓쳐 버리고 부수적인 것에 붙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은 애당초 언급할 가치가 없는 문제입니다. 신앙의 기준이나 근거로 삼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베푼 사람에 따라 세례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거나 격상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례를 받되 세례를 받는 의미에는 관심 두지 않고 세례 받는 자신의 종교적 가치가 높아지는 것에만 치우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항상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짐으로써 나타납니다.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짐으로써 가시적인 것에 붙들리고 몰두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형식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형식을 필요 없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엇이든 형식이 복음의 본질은 아니기에 형식 자체에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형식 또한 복음을 전하는 도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역시 복음을 위한 도구일 뿐이기에 세례 준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이 발생했다는 것은 복음을 말하고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본질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 필요한 것은 십자가가 증거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은석교회 여러분 또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아신다면 그 앎이 여러분을 십자가가 품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로 끌어가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여러분의 매일의 삶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십자가가 증거 하는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복음이 말하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지를 살피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십자가에 대한 증거를 들어야 하는 것이기에 ‘나는 안다’라는 반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 나타나는 부정적 현상 중의 하나는 십자가 복음이 희미해지고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소위 인기 없는 말로 전락되었습니다.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자기 취향에 따라 교회를 다니며 자기 마음에 드는 목사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요?

 

 

십자가 복음을 들었을 때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발생될 수밖에 없는 사건은 죽음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사실적으로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영원히 죽은 자일 수밖에 없는 자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십자가 복음을 들으며 자신이 복음에서 멀어지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044
2010.01.01 511 로마서 로마서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65240
2010.01.01 510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42445
2010.01.01 509 사도행전 사도행전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41253
2018.08.14 508 마가복음 마가복음 신윤식 30680
2010.01.01 507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30524
2010.01.01 506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044
2018.08.13 505 야고보서 야고보서 신윤식 19651
2010.01.01 504 마태복음 마태복음 성경강해 1 은석교회 17060
2010.01.01 503 히브리서 히브리서 성경강해(음성설교 다운 가능) 1 은석교회 15398
2018.11.24 502 마태복음 마태복음 69강 이전설교 신윤식 13502
2013.09.27 501 빌립보서 빌립보서 강해(음성) 신윤식 12476
2010.01.01 500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10550
2010.01.01 499 요한1서 요한일서 성경강해(음성파일 다운 가능) 은석교회 9813
2010.01.01 498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성경강해(음성) 은석교회 9642
2010.08.30 497 마태복음 (102강) 칠병이어 신윤식 9348
2009.12.29 496 마태복음 (69강) 복음으로 사는 길 은석교회 8773
2011.01.16 495 마태복음 (121강) 천국과 고자 신윤식 8416
2012.10.07 494 누가복음 (31강) 예수로 인한 실족 신윤식 8212
2013.07.23 493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강해(음성) 신윤식 8063
2010.10.18 492 마태복음 (109강) 행한 대로 갚으리라 신윤식 728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