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6.10 13:59

(6강) 십자가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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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설교>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지 못하면 마치 수학문제 풀이를 참고서를 보고 외워서 쓰는 수준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답만 머리에 암기하고 있는 수준인 것입니다.

 

 

이처럼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답만 암기하고 있다면 다른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갈 수 없게 됩니다. 또 다시 참고서에 있는 문제 풀이를 암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답을 맞게 적었다 해도 문제를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도, 십자가를 안다는 것도 머리에 암기되어 있는 답을 정확히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 안의 세계가 납득이 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는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아는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한 자들의 행태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찾고 그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세계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예수님에 대한 정답만 머리에 암기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삶의 토대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나뭇잎이 시냇물에 떨어져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처럼 삶이 십자가의 능력에 붙들려서 십자가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믿음은 착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십자가가 삶의 토대라면 그 삶은 십자가에게 장악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이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에는 육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세례 베푼 자를 따라 사람이 나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 의식이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데도 불구하고 세례 베푼 자에게 초점을 두면서 그 사람의 이름의 가치에 따라 세례의 가치도 다를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를 알지 못하고 단지 세례를 받은 것만 부각시킴으로 세례의 참된 의미를 왜곡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께 붙들려 있으며 예수님으로 인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세례에 있어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로 인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바울에 의해 구원 받는 것도 아님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분쟁과 함께 많은 문제들을 드러낸 것은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가 어떤 존재이며 자신을 거룩하게 하게 하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문제를 십자가로 풀어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십자가를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 고린도 교회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조건적인 것들에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십자가의 세계를 알고 믿는다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면서 나누어지는 분쟁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고 말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께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말씀도 거부하면서 살던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십자가의 피의 용서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를 알게 하고 믿음에 있게 했다면 신자에게 존귀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지 자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사람, 그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세례 베푼 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베풀고 세례 받는 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든 중심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로 모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보다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다면 유명한 특정 인물을 앞세우고 그에게 속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과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은혜를 모르고, 예수를 말하면서도 은혜를 모르는 결과입니다. 물론 어느 기독교인이든 자신이 은혜를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증거 되는 은혜 안에서 분쟁은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나는 은혜를 알지 못한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은혜는 참된 은혜가 아니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면서 분쟁이 있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는 관심의 전환을 뜻합니다. 나에 대한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요일 2:25절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일 5;11절에서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는데 그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고 말합니다.

 

 

아들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원수 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신자는 생명이 있는 자로 함께 합니다.

 

 

이것을 요일 5;13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 차이가 있을까요? 누구에게 속했는지가 중요할까요? 어느 교회에 다니는지가 중요할까요? 어떤 목사에게 설교를 듣는지가 중요할까요? 어느 교회를 다니고 누구에게 설교를 듣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면 아들이 있는 것이고 아들이 있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한다거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정해줘야 예수가 예수되고 십자가가 십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정하는 예수가 예수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왜 멸망 받을 자에게는 미련한 것일까요? 미련하다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그것을 본 사람들은 노아를 미련하다고 조롱하지 않았을까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배를 만든다고 고생을 하고 있으니 노아의 방주는 홍수로 멸망 받을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만 생각했습니다. 심판을 잊어버리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삶을 생각한다면 노아 스스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미련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심판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현실의 삶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방주를 만드는 일에 모든 인생이 붙들려 있는 것으로 갈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주의 가치는 온 세상이 물로 덮이는 심판으로 인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심판에서의 구원의 능력은 방주라는 사실이 증거 된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무엇입니까? 심판에서 구원 받은 것으로 그동안의 노고가 보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구원이 노아의 보상이라면 처음부터 노아가 거주하는 지역에는 비가 내리지 않게 하셨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수고롭게 미련하게 보이는 방주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남들처럼 자신을 위한 삶을 실컷 누리다가 구원을 받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구원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기독교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방식일 것입니다. 소위 육신도 잘되고 영혼도 잘되는 구원을 예수의 이름으로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를 안다 하도 인정을 해도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노아와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곳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하여 심판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노아도 심판 속에서 구원 받아야 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심판에서 건져짐을 뜻합니다. 죄의 권세에 붙들려 영원히 멸망에 갇혀야 할 존재가 죄의 권세를 이긴 자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구출되고 나를 건지신 그 분께 속한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그 방식이 미련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구원 방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구원 방식은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공로가 있듯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도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로에 대해 세상에서 보상 받고 구원 받는 것을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구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능력이나 공로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다만 예수께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구원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고 십자가의 세계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을 다른 누군가에게 속한 자로 보지 않게 됩니다.

 

 

신자는 목사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목사에게 인정받고자 하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행동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으로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은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예수님을 섬기는 예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변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변호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정당화 하고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오류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멸망 받을 자의 모습으로 말하면서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너희는 지옥 간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너희가 어떤 길로 가고 있는가를 보아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 사람이라면 성도는 분명 예수의 사람인 것이고 예수의 사람에게는 예수님만이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게 속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를 믿는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분쟁과 파벌로 드러난 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명이라는 말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 생명입니다. 물론 실감하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의 심판을 생각하면 생명의 가치는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에게 속했다 해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성도는 어떤 사람을 따르거나 그와 사귀고 친분이 있다 해서 그것으로 자신을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미련한 것이고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세상의 능력이나 사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심판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신자는 심판을 생각하며 십자가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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