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7.01 17:35

(9강) 주 안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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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설교>

기독교에서는 성화를 말합니다. 성화는 글자 그대로 ‘점차 거룩하게 되어 간다’는 뜻인데,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고 의롭게 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완성의 모습으로 점차 나아져 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완성은 죽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화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화는 내면의 변화를 추구하고 내면의 변화는 외적인 변화로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가 없으면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죽은 믿음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성화를 이렇게 이해하면 성화는 인간이 죽는 순간까지 진행되어야 할 점진적 사건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적이라면 신자는 매일 자신의 모습에서 부족함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는 완성을 이룰 수 없고 완성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화를 이렇게 이해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성경은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완성의 모습 자체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자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즉 성경은 신자가 내적이나 외적으로 완성을 향해 점차 나아져가야 한다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신자의 완성은 어떤 수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마 대개는 죄가 없는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인간이 죄 있는 존재임을 생각하면 완성은 죄 없는 상태라고 답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완성을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늘 자신에게서 죄를 보게 될 것이고 부족함을 느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것을 성화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성화의 상태가 과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 드린 성화의 개념으로 고린도 교회 문제를 다루게 되면 고린도 교회는 내적, 외적 변화가 없는 즉 성화되지 못한 교회로서 성화가 반드시 필요한 교회라는 진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분쟁과 분파가 있는 고린도 교회가 성화된다면 그것은 분쟁과 분파가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사라진 분쟁과 분파의 모습은 이후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분쟁과 분파는 인간의 본질적 습성이기에 완전히 사라질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관계의 개선으로 인해서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 습성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다른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성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헛된 논리일 뿐입니다.

 

 

본문 30,31절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신앙의 증거, 또는 열매가 자신이 변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있고 성령을 받았다면 성품과 삶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의 변화이기에, 행동의 변화로 신앙이 확인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앞에서 말씀드린 성화로 규정을 하지만 과연 그것이 신앙과 신앙의 열매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성경이 말하는 내용인지가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말씀드린 것이지만 사도 바울이 성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부르심을 받은 자로 말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완성이고 완전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완성되고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완성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으로 이미 완성에 속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존재하는 것이 신자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매우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성경의 이론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성경은 신자를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부르심을 받은 자로 말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 밖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기에 스스로를 신자라 하면서도 완성에 속한 자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 된 여러분의 상태입니다.

 

 

이것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물론 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신비의 세계이기에 상상도 안되겠지만 여러분의 부족과 연약과 죄, 그 모든 것이 가려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원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누리는 상태임을 생각해 본다면 여러분은 신자라는 것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서 죄의 모습이 보이면 그것을 예수 안에 있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스스로도 지혜 있고 의롭고 거룩하고 구원 받은 자로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는 잊게 되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회를 이뤄가면서 신자답다는 평을 받고자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고 의고 거룩이고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혜로워야 되고 의롭게 되어야 하고 거룩해져야 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할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신자는 지혜 있고 의롭고 거룩하고 구원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성화가 필요할까요?

 

 

예수 안이라는 것부터 우리의 행함이나 의와는 무관합니다. 예수 안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신자에게만 허락된 세계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의로움도 거룩도 구원도 하나님에게서 나신 예수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의 믿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계 22:11,12절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불의를 행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자가 의를 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불의와 의는 인간의 결단과 의지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는 것 역시 동일한 뜻입니다.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은 그가 의로운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이기에 의가 행해지는 것이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자기 성품과 의지로 선택해서 실천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의를 행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의로운 자고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 안에 있음으로 의를 행하고 거룩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안에서의 의와 거룩은 우리의 신앙 행위와 도덕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사람은 불의를 행한 그대로 불의를 행하며 살아갈 것이고 더러운 자 그대로 더러운 자로 살아갑니다. 이웃을 돕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예수 밖에 있는 것 자체가 불의하고 더러움이기 때문에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로운 자이고 거룩한 자입니다. 의로운 자로서 의를 행하는 것이 당연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한 자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은 의를 행했는가 불의를 행했는가를 보시고 그에 따라 상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상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무관하게 오직 예수 안에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 안에 있는 신자로서 자랑할 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 있는 신자에게 의로움과 거룩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았고 그리스도로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안이 완성의 상태고 우리가 완성되어야 할 부분이 없다면 과연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의미 없는 넋두리처럼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으면 신앙인으로 사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든 사도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문제와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는데 여러 문제들을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가 그렇게 해결되는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굳이 긴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희는 죄인이야 그러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해’이런 말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를 살피면서 예수 안에 부름 받은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오해에서 벗어나는 좋은 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고 거룩이고 의로움이고 구원이며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에 의해서 의로운 자는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자는 불의함 그대로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분쟁과 분파를 일으키지 않고 서로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가리켜 의를 행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0:5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의 의로 살리라’고 말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 그 의로 구원 받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0: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를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롬 10:9-10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생각하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한 것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비록 바울에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기억하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했다 해도 ‘나는 바울에게 속한 자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예수가 주되심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주안에서는 바울에게 속했든 아볼로에게 속했든 사람에게 속한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타인을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26절의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나 능력이나 문벌을 보시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그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는 말씀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예수 안에서의 지혜와 거룩과 의로움과 구원을 생각하면 우리는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의와 거룩에 속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자랑한다면 돈이나 권력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자식이 세상에서 잘 된 것 또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자기 믿음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특정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것은 그렇게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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